2020년 12월 7일 월요일

백인섭의 산 :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개척등반-2

 

[산을 말한다 |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공룡릉~봉정암 개척등반 


                             글·사진 백인섭 산악인 요델산 악회 

설악에서 가장 험한 등반로 개척기 

나는 비록 아침을 굶었지만 빈 몸이라 가볍게 계곡을 내려 갈 수 있었다. 어지간한 폭포는 밑에 쌓인 눈 때문에 그대로 미끄러져 순식간에 내려갈 수 있었지만 쌍폭만은 그 높이 때문에 그럴 수 없어 옆으로 돌아 내려갔다.


오세암 갈림길 근처 계곡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멈춰 서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주위를 살폈다. 그 소리는 몇 십m 위쪽 숲 속에서 들려왔다. 호기심에 재빨리 그리로 뛰어 올랐다.



	개척 당시의 임청규, 엄홍석 대원. 한 손에 피켈, 양쪽 발에는 생선 장수 장화에 8발 아이젠을 차고 기슬링 배낭에 군용자일과 설피를 얹고 있다.
▲ 개척 당시의 임청규, 엄홍석 대원. 한 손에 피켈, 양쪽 발에는 생선 장수 장화에 8발 아이젠을 차고 기슬링 배낭에 군용자일과 설피를 얹고 있다.

꿩 잡아먹고 다리 부러지고…


거기에는 참혹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바로 피투성이가 된 꿩이 퍼덕이며 질러대는 비명이었고, 새매 한 마리가 그 꿩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꿩은 이미 목 줄기가 찢겨진 상태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눈 위에 피를 뿌리면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매는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꿩을 계속 공격해 댔다.


꿩이 가여워서 구출해 줄까 하는 순간 굶주린 내 속에서 맹수의 본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을 송두리째(꿩만이 아니라 새매까지) 나의 아침거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손에 피켈을 움켜 쥐고 나무 뒤에 숨어서 적당한 기회를 엿보았다. 매는 자신의 신나는 사냥에 몰두하느라 뒤에서 인간이라는 맹수가 호랑이 이빨보다 더 무서운 피켈을 치켜들고 숨죽이고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꿩을 공격하고 있었다. 매가 꿩을 덮치는 순간에 잽싸게 뛰어 나가 매를 향해 피켈을 휘둘렀다. 한 마리의 날쌘 표범처럼. 그러나 매가 날쌔게 피하는 바람에 날개 깃털 몇 개만 뽑았을 뿐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애석하지만 푸덕대는 꿩만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매 역시 대단한 것이 도망치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면서 울부짖으면서 내게 덤벼들려 하고 있었다. 자기 먹이를 되찾으려는 발광 아니 대단한 용기였다.



	봉정암 본체. 1967년 가을.
▲ 봉정암 본체. 1967년 가을.

계곡에 내려와서 우선 불을 피웠다. 꿩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내 손에는 요리할 도구가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피켈로 꿩의 배를 찢고내장만을 제거한 후 그대로 불에 구웠다. 털이 다 타버리고 드디어 맛있는 통 꿩 구이가 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먹어 보는 꿩 구이로 배를 채우고 똥집만은 남겨서 가방에 넣었다. 남아 있는 대원에게 보여 주려고. 매는 아직도 가지 않고 내 머리 위에서 끽끽거리며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매에게 말했다. 네가 꿩을 잡아먹으려고 한 것과 내가 네 것을 빼앗아 먹은 것은 똑 같은 이치이고, 세상만사란 원래 한치 앞을 모르는 거니 너무 그러지 말라고.   


꿩 한 마리를 송두리째 먹어치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용대리로 내려왔다. 그런데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지금 전쟁이 터져서 나라가 온통 뒤집혔다고 야단들이었다. 동해에서는 해전이 벌어졌고(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이었음) 서울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나중에 알고 보니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급습 사건이었음).


아, 드디어 우리 국민 모두가 두려워하던 최악의 그날이 온 것이란 말인가. 난감했다. 장가 한 번 못 가보고 이대로 끝장이란 말인가. 이젠 집에 갈 수도 없으니. 가끔 재미삼아 얘기한 대로 여기서 설악산 유격대가 되어 조국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어찌 됐거나 그제야 후발대가 오지 않은 아니 올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한 치 앞일을 모른 건 비단 꿩 잡아먹으려던 매뿐만이 아니라 만물의 영장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봉정암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털어서 쌀 대두 한 말을 사서 지고 점심을 사먹고는 다시 봉정암으로 출발했다. 가서 어찌 할 것인가를 상의하는 수밖에.



	깊은 눈을 헤치며 공룡릉에서 가야동계곡으로 내려서는 대원들.
▲ 깊은 눈을 헤치며 공룡릉에서 가야동계곡으로 내려서는 대원들.

올라가는 길은 멀고도 힘이 들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에 쌍폭 아래 다다랐는데 위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대원들이었다. 봉정암에서 내 소식을 궁금해하다가 거기까지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봉정암에서 쌍폭까지 내려오는 동안 나는 용대리까지 내려가서 쌀 대두 한 말을 사서 짊어지고 다시 쌍폭까지 올라왔는데.


어쨌거나 너무 반가운 마음에 한시라도 빨리 그들을 보기 위해서 우회하지 않고 바로 쌍폭 빙벽으로 직접 붙어 올라갔다. 몇 m 올라가다가 경사가 너무 급해져 빙폭 옆쪽 바위로 오르려고 발을 바위 면으로 딛는 순간에 그동안 뭉뚝해진 아이젠 이빨이 미끄러져 버렸다. 악! 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는 그대로 몇 m 추락해서 바닥으로 쾅! 하고 떨어져 버렸다.


심각한 상황은 떨어진 후에 발생했다. 쌀 대두 한 말을 짊어진 채 떨어지면서 얼음 바닥에 내 다리를 깔고 뭉갠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내 두 발에 신겨진 여덟 발짜리 아이젠 때문이었다. 총 16개의 이빨 중 몇 개가 바로 내 다리 혹은 엉덩이의 어딘가를 후벼 파지 않았을까 하는 공포에 떨면서 조심스럽게 손으로 엉덩이와 그 밑에 깔린 다리를 더듬으며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손에 피가 묻어나질 않았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를 옮기려 하자 말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져 비명을 지르며 자빠져 버렸다.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폭포 위에서 내가 떨어지는 소리와 연이은 비명소리에 놀란 대원들이 황급히 폭포 옆길로 내려왔다. 몇 명의 부축을 받아 나는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설 수 있었다. 깔렸던 다리를 살펴보니 발목이 으스러졌는지 몹시 아팠고 정강이 위쪽이 칼로 쑤시는 듯 아파 왔다.


걷기는커녕 그냥 설 수조차 없었다. 나중에 서울 와서 사진을 찍어 보니 정강이 뼈 두 가닥 중 한 가닥이 부러졌다. 일곱 명의 장정이 번갈아 가면서 나를 업고 봉정암으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은 지옥 그 자체였다. 등에 업힌 내 다리가 흔들릴 때마다 다리가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나를 업고 걷는 후배들마다 덩치가 좋은 놈이건 나쁜 놈이건 스무 발짝쯤 가면 허물어져 버려 교대해야 하니 그때마다 구겨질 수밖에 없는 내 다리의 통증으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넘어 내려온 공룡릉의 눈 덮인 풍광.
▲ 우리가 넘어 내려온 공룡릉의 눈 덮인 풍광.

자정쯤에 우리는 봉정암에 도착했다. 나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오늘 이렇게 끔찍한 밤을 맞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단 말인가. 정말 한치 앞을 볼 수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기나긴 하루였다. 그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놈의 김신조 일당 때문이었다.


갑자기 설악동 사냥꾼들의 얘기가 생각났다. 그들이 깊고 험한 산 속으로 들어갈 때는 부정 타는 음식을 절대 피해야 하는데, 특히 닭고기는 며칠 전부터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새벽에 먹은 것이 바로 닭고기와 거의 같은 꿩 고기가 아닌가. 결국 부정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산신령님이 벌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환자 수송작전…썰매 대신 나뭇가지를 타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오른쪽 발목은 더욱 부어올라 금방 터질 듯했고 무릎 아래 정강이는 여전히 칼로 쑤시는 듯 아팠다. 유격대고 뭐고 우선 내 다리부터 고쳐야 한다는 급박한 생각에 일단 용대리로 하산하기로 했다. 쌍폭계곡이 험해서 가야동계곡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얘기나 지도를 보면 거기엔 그리 험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걷기는커녕 잠시 서지도 못하는 나를 어떻게 머나먼 용대리까지 이송할 수 있단 말인가. 들것을 만들어 이송할 수도 없었다. 한 명이 겨우 오르고 내리는 좁고 험한 산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업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젯밤 나를 업고 쌍폭에서 봉정암까지 짧은 거리 이동에도 업는 자와 업히는 자 모두가 몇 시간 동안 죽을 고생한 걸로 미루어보아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더구나 그 먼 길을 무거운 환자를 업고 내리막길을 내려간다면 모두 지쳐서 비틀거릴 것이고 그 와중에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진다면 환자가 더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산에서는 1차 부상보다 이송 도중에 발생하는 2차, 3차 부상이 더욱 치명적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은 여러 개의 큰 소나무 가지를 겹쳐 쌓아서 줄로 묶어 썰매처럼 사용해서 계곡 한가운데로 빙판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무더미 밑에 깔린 무성한 솔잎이 미끄럼판 역할을 해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일단 가야동계곡까지는 어제 밤처럼 번갈아 가면서 업고 내려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계곡에 내려서서 생각했던 대로 소나무 가지들을 크게 잘라 여러 개를 겹쳐서 더미를 만들고 자일로 엮어 맸다. 나는 나뭇가지 더미 한가운데 걸터앉고 네 귀퉁이에 자일을 매서 두 줄은 앞에서 끌고 두 줄은 뒤에서 제동을 걸어 사두마차처럼 균형을 잡으면서 계곡 한가운데로 얼음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소나무 더미는 훌륭한 썰매 역할을 해주었다. 나무더미에 올라타 미끄러져 내리는 동안 나는 오버슈즈에 싼 아픈 다리가 장애물에 걸리지 않도록 내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해야 했다. 그리고 앞쪽 두 줄의 마부들에게는 길을 바로 잡도록 방향조정을 해주면서 줄을 당겨라 당기지 마라, 그리고 뒤쪽 두 줄의 마부들에게는 줄을 고정해라 늦춰라 등등 때맞춰 적절히 주문해야 했다. 가야동계곡이 초행이라 중간 중간에서 지도를 꺼내서 길을 잡는 일 또한 내 몫이었다. 바로 대장이 부상을 당했으니 당연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었다.



	가야동계곡에서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서 잠시 멈춰선 임청규.
▲ 가야동계곡에서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서 잠시 멈춰선 임청규.

이렇게 해서 성할 때 반나절 만에 내려간 거리를 만 3일간의 사투 끝에 용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3일간의 또 다른 초등 개척이었다. 백담사 근처에서부터 남의 부축 없이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절름발이 걸음으로 하산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동물임을 새삼 확인하면서.


후에 당시 나의 유일한 동료였던 임청규는 그때 상황을 존 웨인이 주연한 제2차 세계대전 영화 <가장 긴 하루(The Longest Day)>에 비유하면서 회상했다. 대장인 존 웨인이 부상당해 들것에 실려 전장을 이동하면서도 전투를 잘 지휘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그때 우리들 상황과 비슷했다고. 그렇다면 가끔 농처럼 얘기했던 설악산 유격대 노릇도 한 꼴이 된다. 


부러진 다리는 개척등반을 위한 당연한 대가


이로써 만 14일간의 동계적설기 자즌바위골-공룡릉-봉정암 코스 개척등반이 끝난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한계와의 싸움이었고 우리 모두는 각자 믿고 있었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낸 것이었다.


용대리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침쟁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퉁퉁 부어오른 발목에 동침을 여러 개 꽂아서 죽은피를 뽑아내었다. 처음에는 내 발목에 박은 몇 개의 동침 파이프를 통해서 누런 물이 줄줄 흘러나오다가 시꺼먼 죽은피가 또 한참 동안 흘러나왔다. 그러자 부은 발목이 금방 가라앉고 통증도 훨씬 약해졌다.


주변에 모여 있던 동네 할아버지들은 “이 추운 겨울날에 도대체 뭘 하려고 이 짓(등산)들을 하고 다니느냐”고 역정까지 내셨지만 그렇게 아프다는 동침을 비명 한마디 안 지르고 담담하게 참아내는 나를 보고는 바로 야단치길 멈추고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저렇게 독하니 그런 짓들을 하고 다니지 하면서.


그토록 걱정됐던 속세의 난리가 어떻게 됐는지 사정을 알아보니 걱정했던 것처럼 전쟁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늘 익숙했던 무장공비가 이번에는 서울, 그것도 바로 청와대 뒷마당까지 가는 바람에 일어난 소란이었다.


따라서 설악산 유격대는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우리는 다음에 어찌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다음 행선지를 서울이 아닌 설악동으로 결정했다. 부러진 다리를 가지고 도대체 뭘 어찌하겠다는 건지 나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찌 됐건 대원들은 모두 내 말대로 설악동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1 짐을 짊어진 채 빙벽을 우회해 바위로 오르는 대원들. 이것이야말로 혼합등반이다. 자즌바위골. 2 완만한 빙사면을 연속등반하고 있다. 자즌바위골.
▲ 1 짐을 짊어진 채 빙벽을 우회해 바위로 오르는 대원들. 이것이야말로 혼합등반이다. 자즌바위골. 2 완만한 빙사면을 연속등반하고 있다. 자즌바위골.

지금 생각해 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지경에 또 다시 설악동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지. 서울이 그토록 싫어서인가 아니면 인간 세상이 싫어서인가. 아니면 너무 좋아서 설악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설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나. 어찌 됐건 그때 상처 입은 내 발목은 평생 동안 부상으로 남아서 등산이나 스키를 조금 세게 하면 심한 통증으로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래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대가쯤은 당연히 치러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나의 블로그에 남긴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나의 비공식적 등반기록 중 일부에서는 당시 100미폭 상단부 초등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기록하고 하단부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아 하단부 초등이 당시 이루어진 건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바가 있었다.



	가야동계곡 빙사면 하산.
▲ 가야동계곡 빙사면 하산.

100미폭 개척 등반은 이 땅의 빙벽 등반 효시


그 이유는 당시 내가 하단부 등반 가능성을 확인한 후 아무런 문제가 없어 교육훈련을 위해 후배들 중 누군가에게 선등을 넘겨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 특별한 기억이 전혀 없었고, 또한 당시 그들이 그것을 당연히 해낸 걸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하단부는 얼음의 상태와 두께도 좋았고, 빙벽에 박을 아이스하켄도 충분했기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무려 40년쯤 뒤 당시 하단부 빙벽을 선등했던 후배가 나의 중단지시에 따라 등반을 포기했다는 주장이 나와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 생각해 보니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당시 빙벽팀이 하단부 빙벽을 오르는 동안 나머지 대원과 8개의 무거운 짐을 올리기 위해서 내가 우측 암벽으로 올라 하단부와 상단부를 가르는 중간 턱에 도달했을 때 기대했던 평평한 지점에 얼음이 두껍게 덮여 급사면을 이루고 있어 비박은커녕 짐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공간조차 없었다. 따라서 얼음을 대량 까내어 짐 올리기 위한 작업장과 비박지를 만들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서둘러 작업을 해야 했는데 얼음을 까내면 얼음조각들이 하단부로 쏟아져 내리게 돼 하단부 빙벽은 물론 그 밑에도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렇다고 빙벽 팀이 등반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이니 나는 당연히 당시 하단부에서 대기 중인 전 대원에게 우측 암벽 쪽으로 대피토록 조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하단부 빙벽등반 중이던 대원들도 등반을 중단하고 내려가서 본대와 합류해서 대피하고 있다가 작업이 완료된 후에 곧장 암벽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하단부 빙벽 초등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분명해진다.


하단부 빙벽은 몇 년 후 나의 토왕성 빙벽 초등 재도전 계획(1973년 예정)에 따라 새로 팀이 된 송준호와 오세진이 나의 주문에 따라 1972년 동계에 자즌바위골에서 빙벽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100미폭 빙벽을 완등한 것이 사실상 초등이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이유는 나는 그때는 물론 최근까지 100미폭 빙벽 초등은 그것만 따로 떼어 얘기할 정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내 블로그에 오래전 수집해 두었던 설악산 등반사가 있어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물론 요델의 초등/개척 기록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몇 가지 누락된 것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 있었다.



	100미폭 하단 초등. 1972년 송준호·오세진.
▲ 100미폭 하단 초등. 1972년 송준호·오세진.

그러다가 토왕성폭포에 대한 초등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74년 토왕폭 우측 암벽이 에코클럽에 의해, 좌측 벽은 다음해 부산 청봉산악회에 의해 초등되었다. 그리고 빙폭은 1976년 초 동국대에 의해 하단부가 초등되었고, 그해 12월 크로니의 박영배에 의해 상단부가 초등되었고 동시에 전체 완등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다(한국산서회 회지 2004). 즉 기록상으로 보면 이 땅에서 거대 빙벽 초등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점이 1976년이었고 대상이 토왕성폭포인 것이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이보다 8년 전 그리고 4년 전에 이루어진 자즌바위골 100미폭 암벽과 빙벽 초등은 토왕성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100미폭 빙벽 초등반이야말로 바로 이 땅에서 빙벽등반의 문을 연 효시적 등반이라고 판단되었다.


두 빙폭이 비록 높이에서는 2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토왕성의 긴 중단부를 생략하면 1.5배 정도인 점 그리고 그 형상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2단의 수직구조) 그리고 빙벽등반장비 수준에서의 엄청난 열악성을 감안해 보면, 8년 전과 4년 전의 100미폭 빙벽 초등이 토왕성 빙벽 초등과 등반성 차원에서 비교해 볼 때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땅에서의 등반기록이라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토왕성 빙벽 초등이 대단한 등반기록인 만큼 100미폭 빙벽 초등도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자즌바위골의 완만한 빙폭에서 대형 짐을 멘 채 연속등반하는 대원들.
▲ 자즌바위골의 완만한 빙폭에서 대형 짐을 멘 채 연속등반하는 대원들.

100미폭 초등기록은 설악산 빙벽등반사에 기록돼야


그런데 100미 빙폭 초등이 왜 설악산 등반사에서 빠져 있을까? 그건 완전히 내 실수였다. 그동안 나는 100미폭 빙벽에 대한 초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기에 그 등반을 별도로 언급하지 않고 그냥 1968 동계 자즌바위골-공룡릉-봉정암 코스 개척기 속에 가볍게 묻어 두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 스스로 해낸 초등/개척 중에서도 100미폭 빙벽뿐만이 아니라 권금성 직벽 동계초등, 노적봉 암릉 초등, 울산바위 동쪽 코스 개척 등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100미폭 초등에 관한한 한국 등반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내 스스로 큰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후배의 기록(송준호와 오세진의 1972년 1월 100미폭 빙벽 하단부 초등과 완등 기록)이 묻혀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100미폭 빙벽 초등에 대한 불명확한 기록을 정정하고 그리고 별도의 등반기록화를 통해서 바로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설악산 개척등반 기록에 추가되어야 한다. 


등반문화적 고찰


등반성 측면_설악에 숨겨진 거대한 산


본 개척등반은 이 땅에서 최고의 등반성을 요하는 장기등산로 발굴 및 개척을 위한 등반이었다. 이로써 설악산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을 동계 적설기에 관통하는 최고난도 등산로가 개척된 것이고, 또한 우리 땅에도 잘 보면 대단한 거산이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소위 히말라야식 등반이 아니라 알프스식 최고난도의 등반을 통해 9일간 매순간 우리의 한계와 싸운 등반이었다. 설악산의 숨겨진 한 자락에서 우리는 이렇게 거대한 산을 찾아 등반한 것이다. 훈련이 아닌 실전으로서. 작은 산을 반복해서 큰 산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핏 보면 작아 보이는 산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진짜 큰 산을 찾아 도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설악은 2,000m에도 훨씬 못 미치는 산이지만 실제로는 몇 천m 높이의 산과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등반과정 속에 설벽등반, 빙벽등반, 암벽등반 그리고 워킹 등 모든 장르의 등반이 어우러져 있었고, 험준한 계곡과 사나운 능선과 하늘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경이로운 자연미와 신비함과 천하독존의 고고함과 두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전 등반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등반능력의 한계선 상에 있었고 더구나 미지의 세계였다.


그리고 베이스캠프를 기점으로 전진캠프를 설치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아니라 8번의 전진 비박을 해가면서, 그리고 단 한 명의 포터나 셰르파도 없이 대원 모두 스스로 40~50kg의 짐을 지고 등반했다는 것은 요즘 해외 산을 대상으로 하는 거산등반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거대한 등반이었던 것이다.


특히 100미폭 빙벽을 대원 8명 전원이 오르고, 지금의 주마 같은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8개의 거대한 배낭을 모두 100m 절벽 위로 끌어올리는가 하면, 중단부에서 얼음을 까내고 8명 전원이 자일에 확보한 채 비박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고난도 등반행위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쌍폭에서의 추락사고 그리고 힘들고 위험한 부상자 이송을 절대고독의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3일간 해낸 것 또한 그러하다.


필자소개 백인섭 산악인(요델산악회)


학력경력 서울 출생, 경복고, 서울대 공대(전기공학), 한국과학기술연구소(선임연구원), 카이스트(전산학석사), 프랑스 IMAG(전산학박사), 데이콤(초대연구소장), 아주대 정보통신대(교수).


등반경력 개척초등 등반(도봉산 :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등. 설악산 :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자즌바위골 등)


등반외 취미활동 스키, 테니스, 윈드서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