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7일 월요일

백인섭의 산 :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개척등반기-1

 

[산을 말한다 |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공룡릉~봉정암 개척등반 


설악에서 가장 험한 등반로 개척기 
▲ 자즌바위골 100미폭 빙벽 하단으로 접근 중.

1960년대 중반까지 설악산의 모든 종주 등반로는 그것이 계곡길이든 능선 종주 길이든 또는 하계등반이든 동계동반이든 모두 워킹(짐 지고 걷기) 위주의 등산로들뿐이었다. 그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등산로가 내설악과 외설악을 관통하는 코스로서 용대리에서 시작해서 백담사와 영시동을 거쳐 쌍폭계곡으로 올라 봉정암에 이르고 거기서 소청·중청·대청을 오르고 천불동계곡으로 내려서 외설악을 관통하는 코스였다.


쌍폭계곡이나 천불동계곡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도 워킹 위주의 등반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았다. 계곡이 넓어서 험한 지역은 그것을 우회해서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원정등반을 주로 하는 친구들은 그것을 히말라야 스타일 등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점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설악산같이 험하고 아름다운 산에서 그런 등산로만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애써 그런 길만을 찾아 등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나는 설악에서 등반성이 제일 높은 등산로를 개척해 내기로 마음먹었다. 며칠간 무거운 짐을 지고 단순히 걷기만 하는 코스가 아니라 마치 외국의 거산 등반처럼 정상에 오르는 동안 암벽등반도 해야 하고 빙벽등반도 해야 하고 설벽 등반도 해야만 하는 그런 등반로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회로가 없는 험준한 바위협곡과 피할 수 없는 폭포와 절벽 그리고 급사면 그리고 심한 오르내림이 있는 코스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동계 적설기에 등반하는 수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우리나라 산의 높이와 기후 때문에 동계 적설기가 아니면 얼음과 빙벽과 설벽 등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내가 후비고 다녔던 설악산 전체를 염두에 두고 지도를 참조하면서 그런 조건을 가질 만한 등반로를 찾기 위해 한동안 고심해서 답을 찾았다.


바로 외설악에서 가장 험한 바위계곡 자즌바위골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파한 후 바로 설악에서 가장 험한 주능선인 공룡릉으로 오르고 거기서 봉정암을 향해서 직선으로 가야동계곡을 가로지르는 등반로를 개척해 내기로 했다. 그 코스를 동계 적설기에 돌파한다면 자즌바위골에서의 고수준 암벽등반과 50미폭, 100미폭에서의 고수준 빙벽등반 그리고 공룡릉을 오를 때의 급설사면 등반 등 모든 등반조건이 갖추어져 이른바 혼합등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외설악에서 설악산의 중심인 내설악 봉정암에 이르는 새로운 길이 하나 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동계 자즌바위골~공룡릉~봉정암 개척등반
개척일시
 1968년 1월 21일~2월 5일  개척대원 백인섭, 임청규, 이형삼, 송준호 등


개척등반 구상 및 준비


짐 줄이기 위해 개척대와 본대로 나누어  


▲ 자즌바위골의 완만한 빙폭에서 대형 짐을 멘 채로 연속등반을 하는 대원들.

나는 그동안 설악에서 실전을 통해 쌓은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하고 그리고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등반을 구상했다. 우선 자즌바위골을 통해서 봉정암까지 개척구간만으로도 최소 7일 정도는 소요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100미폭까지 가는 데 3일 그리고 폭포를 오르는 데 2일 그리고 폭포 위에서 공룡능선까지 하루, 거기서 봉정암까지 하루. 따라서 개척구간에서만 최소 만 7일을 예상했다. 그러나 대상이 아주 험한 미지의 곳이라서 예비로 2일을 더 잡았다. 그리고 봉정암에서 내설악으로 하산하든 외설악 쪽으로 하산하든 최소 2~3일이 더 필요하고 만약 개척이 아닌 일상의 동계등반까지 즐기려면 4~5일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대충 보름 정도 등반해야 하는데 아주 풀기 어려운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대원 각자가 짊어질 짐 무게였다. 이런 등반을 해내기 위해서는 동계 적설기의 등반을 위한 각종 개인장비와 빙벽 및 암벽등반을 위한 공동장비 그리고 보름치 식량과 취사장비와 야영장비를 짊어져야 한다. 따라서 각자 적어도 60~70kg의 대형배낭을 멘 채 때론 암벽등반을 때론 빙벽등반을 때론 설벽등반을 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어쨌든 짐무게를 각자 40~50kg 정도로 줄여야 하는 것이 지고의 과제였다.


나는 우선 클럽의 정규 동계등반과 개척등반을 분리해서 서로 이어지도록 구상했다. 개척대가 봉정암에 도착하는 시점에 본대가 그리로 도착해 합세해서 나머지 정규등반을 치러내는 것이다. 그리되면 개척대는 15일이 아닌 9일간의 개척등반에 필요한 짐만 가지고 가면 되기에 짐의 무게를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 그리고 개척대의 식량은 아침저녁 떡국 그리고 점심은 샌드위치로 간편화하고 취사는 모닥불로 그리고 야영 대신 비박을 하면 취사장비와 야영장비의 무게가 추가로 배제됨으로써 각자 짐의 무게가 40~50kg 정도로 유지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요델의 1968년 동계등반은 이원화해서 우선 개척대가 먼저 출발하고 개척대가 봉정암에 도착하는 날짜에 맞추어 본대가 개척대의 나머지 식량과 장비를 가지고 용대리에서 봉정암으로 올라와 합세해서 나머지 정규 동계등반을 하도록 조처했고 후발대 대장을 백인상이 맡도록 했다.


두 번째 문제는 100미폭 빙벽 돌파였다. 작년 여름에 100미폭을 우측 암벽으로 올라본 경험을 통해 보면 여러 명이 상·하단을 무거운 짐까지 지고 하루에 오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중간, 즉 하단부 위에서 비박하고 다음날 상단부를 오르는 수밖에 없을 걸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중단부에서의 비박이었다. 몇 명이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비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난 여름 폭포 암벽등반 시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중단부 우측 구석에 좁은 협곡이 있고 그 바닥에는 꽤 큰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몇 백만 년 동안 폭포수가 그리로 떨어져 바위가 패인 것이 분명했다. 겨울에 그곳이 얼면 짐을 끌어올리는 작업장은 물론 10명 정도는 충분히 비박할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또 한 가지 걱정은 40~50kg나 되는 무거운 짐을 어떻게 수십 미터 수직절벽 위로 끌어올릴 것인가였다. 그런 짐은 버스 탈 때 두 손으로 잠시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워 쩔쩔매는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움직도르래를 사용해서 짐의 무게를 절반으로 줄이고, 바위 면이 아니라 얼음 면으로 짐을 끌어올려 마찰력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 1 자즌바위골 계곡등반 중 필자. 2 개척등반 페넌트. 3 수제 파이프형 아이스하켄.(1968)

대원 구성 및 준비 


개척대는 힘과 등반 실력 좋은 대원 8명


여성 대원, 힘이 약한 대원, 등반경력이 좀 모자라는 대원은 개척대에서 빼고 후발대에 참여하도록 했다. 따라서 개척대는 모두 힘 좋고 등반 실력이 좋은 요델산악회의 정예대원으로만 구성했다. 동료인 임청규와 요델 2기의 송준호, 엄홍석, 나경봉, 전철민 그리고 3기의 이형삼과 선배인 서성우 이상 8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개척대는 개인장비로서 각자 미제 군용 라켓설피와 오버슈즈(미제 군화를 신고 그 위에 덧신는 고무장화), 8발짜리 아이젠(당시 유일한 국산 등반 장비 메이커인 남대문시장의 마포 할아버지가 손수 두들겨서 만든 것), 그리고 비박장비로서 군용 에어매트리스와 방수 외피와 담요 내피를 모두 갖춘 닭털 침낭을 준비하도록 했다. 공동장비로서 40m짜리 군용자일 4동, 피켈 2자루(동계등반 시 개인 필수장비이지만 당시는 귀하고 비싼 것이라 그리 할 수 없었음), 그리고 어렵게 구한 값비싼 일제 앵글형과 스크루형 아이스하켄 몇 개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100미폭 빙벽을 오르려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궁리 끝에 내 손으로 아이스하켄을 제작했다. 청계천 공구가게에서 찾아낸 직경 3cm 정도의 스테인리스스틸 파이프를 30cm 길이로 자르고 한쪽 끝은 사선으로 뾰족하게 잘라서 얼음 속으로 쉽게 파고들게 했고, 뒷부분에는 두께 2mm 정도의 철판 양쪽에 구멍을 뚫어 볼트를 박아 조이고 거기에 군용 보조자일을 잡아매어 고리를 만들어 카라비너를 걸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직접 시험해 보니 그런대로 얼음에 잘 박히고, 몸무게는 물론 어지간한 충격까지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가지 문제는 회수하려면 박힌 얼음을 모두 까내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값도 싸고 만들기도 어렵지 않아 30개 정도를 만들었다. 빙벽 또는 절벽에서 무거운 짐을 달아 올릴 때 무게를 반감시키기 위한 소형 움직도르래도 어렵게 한 개를 구입해 갖추었다. 등산용으로 만들어진 일본 제품이었다. 물론 암벽 장비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남들 모르게 아주 간단한 손저울도 한 개 장만했다. 원정등반 시에는 종종 짐의 무게 때문에 대원들 간에 기분 상할 정도의 갈등이 빚어지기 때문이었다.  


▲ 자즌바위골 100미폭 빙벽 하단부 빙벽등반.

개척등반


자즌바위골은 또 다른 멋진 세계를 펼치고 있어


1968년 1월 19일 저녁 우리 모두는 신설동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여인숙에 모였다.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공동장비 점검과 골치 아픈 공동장비 할당(식량 및 클라이밍 장비)이었다.


특히 대형 원정의 경우 대원들은 모두 개인 짐 무게 때문에 공동장비는 결사적으로 맡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항상 자신의 짐이 제일 무겁다고 투덜대는 대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손저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또 때론 덩치를 불문하고 똑 같이 무게 분담을 해야 한다는 얌체 같은 주장을 펴는 대원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다면 덩치를 불문하고 똑같은 양의 식량을 먹어야 한다고 냉혹하게 처방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옹다옹하다보면 어느새 새벽 4시가 된다. 바로 속초행 첫 버스 출발 시간이다. 어쨌거나 사람이 여럿 모이다보면 그중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있게 마련이다. 그중 가장 나쁜 놈은 덩치 좋고 힘도 좋은 데도 불구하고 공동장비는 나 몰라라 하고 궂은일은 전혀 안 하면서 식량은 남보다 많이 축내는 사람이고, 가장 좋은 놈은 팀을 위해서 아주 어렵고 힘들 때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등반대의 경우 특히 일반 산악회의 경우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원 간에 혈연도 학연도 지연도 없고 어떤 사회적 이권으로도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대장 노릇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속초행 새벽 첫차를 타면 덕소를 지날 무렵 동이 튼다. 버스는 중앙분리대는커녕 도로 중앙선조차 없는 비포장도로를 덜컹대면서 달린다. 버스 뒤로는 흙먼지가 마치 분무기로 연기를 뿜어대는 것처럼 하늘을 덮는다. 정오쯤에 홍천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해서 온 종일 달리고 또 달려서 오후 늦게 진부령 외길을(당시 진부령고개는 차 한 대밖에 다닐 수 없어 속초행·서울행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주행하는 아슬아슬한 단일로였다)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고성을 거쳐 저녁 무렵 속초에 도착한다.  


▲ 점심식사. 등반속도 때문에 매일 샌드위치를 만들어 간편식을 했다.

온종일 작고 불편한 버스의자에 앉아 흔들리는 몸을 바로 잡느라 그리고 초소 검문에 시달리느라 몸은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원통을 지난 뒤부터는 차창 밖으로 설악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창문 틈으로 설악의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정도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속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설악동행 첫 버스를 타고 설악동으로 들어가 바로 등반을 시작했다.


비선대를 지나고 설악골을 지나 자즌바위골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오직 눈과 얼음과 바위 절벽 그리고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들뿐이었다. 지난 겨울에 정찰등반하려다 실패한 뒤 봄에 다시 올라 범봉을 초등하고, 여름에 100미폭 상하단 암벽을 초등개척한 후 이제 다시 자즌바위골을 찾은 것이다. 이번에는 바로 그 속에 숨겨져 있는 50m와 100m 빙폭을 초등하고 자즌바위골을 끝까지 오르고, 험준한 공룡릉을 직등해서 오르고 거기서 가야동계곡을 가로질러 봉정암에 이르는 등반성이 아주 높은 동계 설악산 등반로를 개척해 내기 위해서였다.


계곡은 또 다른 멋진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주변을, 특히 협곡 위를 주시하면서 올라야 했다. 지형적으로 좁은 협곡인 데다 적설기이고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1월 말이라 위로부터 낙석이나 눈사태의 위험이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곡 여기저기에는 떨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커다란 바윗덩이와 작은 돌덩이들이 널려 있었다. 또한 눈사태로 눈이 수북하게 쌓인 곳들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건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그런 것들이 떨어져 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경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절벽 자체가 아니라 그 위의 지형들을 잘 살피는 것인데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직의 바위절벽으로 해서 대개는 시야가 막혀 불가능했다. 따라서 많은 부분 설악산 산신령께 우리의 운수를 맡기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그냥 오를 것인지 줄을 매고 오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줄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 선등자와 확보자를 정해 주고 나머지 대원의 행동요령도 정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전진루트를 탐색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행군 때는 항상 선두와 후미를 지정해서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야 했고 행군 중 유난히 처지는 대원에 대한 적절한 조처(짐을 덜어 주든지 또는 전진속도를 늦추든지)도 해야 했다. 또한 행군 중에는 항상 전체상황을 파악해야 했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시 교정조처(등반 간격, 확보상황, 등반속도 등)를 취해야 했다.  


▲ 100미폭 중간 단에서 움직도르래를 사용해서 짐을 끌어 올리고 있는 대원.
<dd id="blog_subtitle">설악에서 가장 험한 등반로 개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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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즌바위골 상단 바위협곡을 올라서는 대원.

우리 산 우리 빙벽 우리 장비로 올라서다


계곡에서만 세 밤을 지내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100미폭 하단에 도착했다.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 멋진 수직 빙벽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전날 오른 50미폭은 경사가 그래도 완만한 편이라 힘들고 위험한 스텝 커팅을 해야 하는 톱과 세컨드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대형 배낭을 멘 채로 빌레이를 받으며 오를 수 있었지만 100미폭의 경우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맨몸으로도 하켄에 의지하지 않고는 잠시 균형 잡고 서 있기도 어려운 수직의 경사였다. 그런 100m 높이의 빙벽을 대원 8명이 올라야 하고, 이어 8개의 무거운 배낭을 끌어 올려야 하니 정말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준비된 상태였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이틀에 걸쳐 빙폭 등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우선 짐을 놓아두고 빙벽장비만을 가지고 일단 빙벽에 붙었다. 하단부의 아래 부분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해 스텝 커팅을 해서 쉽게 올라 수직 빙벽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첫 번째 확보용 아이스하켄을 설치하려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어렵게 구한 비싼 일제 앵글형 아이스하켄을 박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켄을 박으면 얼음덩이로 깨어져 나가 결국 바위 면이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하켄이 얼음에 박히는 장치가 아니라 얼음을 모조리 까내 버리는 장치가 된 것이다. 전혀 예상 못 했던 낭패스러운 상황이었다. 얼음이 청빙 상태로 너무 단단하고 박는 하켄이 너무 두꺼워서 그런 것 같았다. 다른 형태의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뜻밖의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내가 손수 제조한 값싼 파이프형 하켄을 박아 보니 기가 막히게 박혀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얼음을 전혀 깨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박혔다. 아마 파이프 철판의 두께가 얇고 파이프라는 구조적 특성 때문인 것 같았다.


하여간 구세주는 정식 등반용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일제 아이스하켄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값싼 100% 국산 수제품 하켄이었다. 외제 장비(더구나 일제) 대신 우리의 장비만으로 우리의 산 우리의 빙벽을 오르게 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지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힌 파이프형 아이스하켄의 안전성과 견고성을 이리저리 시험해 보고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제부터는 스텝 커팅을 해가면서 연속적으로 아이스하켄을 박고 오르면 되는 것이다. 마치 인공암벽등반처럼. 그래서 선등을 후배들에게 넘겨주었다. 후배들의 교육훈련을 위해서 그리 한 것이다. 그들은 처음 해보는 빙벽등반이라 속도가 너무 느렸다.  


▲ 자즌바위골 50미폭 빙벽.

한참 후 나는 문득 등반시간이 심각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해 지기 전에 전 대원 8명이 오르고, 무거운 배낭 8개가 하단부 위로 올려야 하는데 그런 속도라면 해 지기 전에 짐은 고사하고 사람만 올리는 것도 어림없었다.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지난 여름에 올라보았던 빙벽 우측의 암벽을 살펴보았다. 절벽 여기저기엔 눈이 묻어 있었지만 표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 턱에 쌓여 있는 눈이었다. 그렇다면 발로 딛고 서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중간 중간에 확보용으로 사용할 만한 잡목들도 꽤 있어 암벽등반이 충분히 가능할 걸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빙벽 팀이 빙벽을 오르는 동안에 나머지 대원을 암벽으로 올리고, 짐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암벽등반 장비만을 가지고 그리로 붙어 올랐다. 지난 여름에 올라본 곳이라서 별 문제 없이 중단부에 올랐다. 그런데 중단부에 올라서 보니 예상치 못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비박 예정지였던 얼어붙은 물웅덩이 위가 평평하기는커녕 얼음이 산더미처럼 뒤덮여 가파른 얼음 사면을 이루고 있었다. 비박은 고사하고 짐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위해서 설 자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엄청난 양의 얼음을 피켈로 까 내어서 짐 올리는 작업장부터 만들어야 하고, 짐을 끌어올린 후 그것을 넓혀서 비박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인데 거기에 힘겹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따라서 아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위벽에 암벽용 하켄을 탄탄하게 설치해서 확보한 후 우선 대원 몇 명을 올렸다. 그리고는 각자의 안전을 완벽하게 도모한 후 얼음 까내기 공사를 했다. 한 시간여 작업 끝에 드디어 짐을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 공간이 마련되었다. 얼음을 까내는 동안 나는 적절한 위치에 움직도르래를 설치했다. 암벽의 적절한 위치에 하켄을 박아서 40m짜리 줄의 한쪽 끝을 고정하고, 다른 40m짜리 줄을 이어서 중간에 움직도르래를 걸고 밑으로 내리면 하단부 수직 빙폭의 경사가 완만해지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거기서 도르래에 짐을 한 개씩 고정한 후 위에서 줄을 끌어 올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끌어 올리는 짐의 무게는 반으로 줄지만 대신 당겨야 할 줄 길이가 갑절로 늘어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으로 줄어든 무게라도 20~30kg가 되고 그것을 수직고도 40m를 올리기 위해서 사실상 80m의 두레박질을 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매우 좁고 위험한 작업공간에서 해야 하니 더욱 힘들어 그것이 끝날 쯤에는 우리 모두가 녹초가 되어 버렸다.  


▲ 100미폭 상단부를 초등하는 필자. 아이스하켄이 떨어져 피켈을 얼음 구멍에 쑤셔 넣어 잡고 오른 후 피켈 없이 빙사면을 등반했다.
▲ 얼음 절벽에 하루 밤 둥지를 틀었다. 100미폭 1단 위에서 얼음을 까내고 8명 전원이 비박. 잘 때도 확보용 줄을 매고 자야 했다.

빙벽 중간에 얼음을 까고 비박


나는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 여기저기 바위 틈새에 하켄을 박고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그리고 전원 모두는 항상 고정로프에 카라비너를 걸고 행동하도록 조처했다. 짐을 모두 끌어올린 다음 얼음을 더 까내어 우리 8명이 전부 비박할 수 있는 정도의 평평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밤중에 잠결에 낭떠러지 쪽으로 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눈을 쌓고 설피를 박아서 담을 쳤다. 그러나 그건 단지 시각적 효과만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음을 녹여서 떡국을 끓여 먹고 따끈한 커피 한 사발을 마실 때쯤 계곡에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덮여 버렸다.


우리 모두는 고정로프에 확보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발치 바로 밑으로는 시꺼먼 공간이 그리고 머리 위로는 수직의 얼음 절벽만이 어둠 속에서 허옇게 보일 뿐 완전한 암흑의 공간 한가운데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아래로 펼쳐지는 시꺼먼 어둠의 공간은 바로 죽음의 심연으로 잠결에 단 한순간 단 한 발자국 실수로도 우리는 그 어둠의 공간으로 날아서 70~80m 아래 바위계곡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승은 단 한 뼘의 좁은 공간이고 저승은 그것을 제외한 전 공간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토록 위험한 얼음 절벽 중간에서 하룻밤의 둥지를 틀고 있는 우리는 천상을 마다하고 설악산에 내려온 신선인가 아니면 얼음 절벽에만 둥지를 트는 겨울 독수리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미친 짓이란 것 말고는 해석이 되질 않았다.


각자 자일을 맨 채로 자기의 잠자리로 군용 에어매트리스에 입으로 바람을 넣어 깔고 위에 개털을 깔고 그 위에 외피와 내피를 갖춘 군용 닭털 침낭을 펴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모두는 얼음 위에서 오로지 자신의 체온만으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밤하늘을 수놓은 총총한 별들 속을 가르면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세면서 소망을 재빠르게 두세 번 읊어댈 쯤 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날씨는 계속 쾌청했다. 2단도 시작부분은 1단처럼 수직이 아닌 사면을 이루고 있어 일단 후배들에게 오르도록 했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수직으로 솟으면서 1단과는 달리 얼음 폭이 좁아지고 두께가 얇아지며 또한 여러 개의 고드름 뭉치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고 해서 어렵고 위험해지기 때문에 내가 선등을 했다.


하켄 설치가 쉽지 않아 몇 군데는 고드름덩이에 슬링을 잡아매서 하켄을 대신 하면서도 올랐다. 또 다른 어렵고 위험한 점은 빙폭의 폭이 좁아서 지그재그 형태가 아니라 거의 직등 형태로 오르면서 스텝 커팅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경우 깨져나간 얼음덩이가 모두 후등하는 대원들 머리 위로 쏟아지게 되어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된다. 당시의 8발짜리 아이젠으로는 프런트포인팅은 고사하고 맨 앞 이빨이 발의 3분의 2 선에 걸려 있기 때문에 어떤 경사에서건 피켈로 스텝을 깎아 디뎌야 했다. 물론 공격조를 제외한 전 대원은 테라스의 가장자리 암벽 근처에서 낙빙을 피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 자즌바위골 상부 계곡에서 바위를 이용하면서 빙벽을 오르는 대원들.

선등하는 나는 되도록 얼음을 조그맣게 까내서 커다란 낙빙을 일으키지 말아야 했고 후등자는 피할 수 없는 경우는 머리를 설피로 보호해야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몇 미터 수직구간을 올라 최상단부에 도달했다. 거기서 마지막 턱을 올라서면 경사가 완만해지는데 그 위로 올라서기 위해 하켄 한 개를 더 설치해야 하는데 남은 하켄이 없었다.내 손으로 만든 파이프형 하켄의 대다수를 어제 하단부 빙벽등반 팀이 쓰고 회수하지못했기 때문이다.


마침 고드름덩이 사이에 깊은 구멍이 있어 피켈을 거꾸로 해서 힘껏 처박으니 매달려도 충분할 정도로 든든한 확보물이 되었다. 그걸 잡고 턱 위로 올라설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얼음 사면을 피켈 없이 올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손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발에 붙어 있는 8발짜리 아이젠만을 사용해서 스텝 커팅도 없이 얼음사면을 올라야 된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총 없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 병사처럼 매우 위험하고 힘들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여분의 피켈도 없었고 한 개 남은 피켈을 밑에서 달아 올릴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가 아이스하켄을 박기 위해서 피크가 뾰족한 록해머를 가지고 있었기에 급한 대로 그걸로 얼음을 찍어서 균형을 유지하면 될 것도 같았다. 일단 해보기로 결심하고 빌레이를 당부한 후 그대로 올랐다. 발로 강하게 바닥을 차면서 아이젠이 깊게 박히게 하면서 록해머로 얼음을 찍어 균형을 잡아가면서 몇 미터를 오르니 마침 든든한 나뭇가지 하나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드디어 100미폭 빙폭 등반을 끝낸 것이었다.


우리는 100미폭 위에서 비박하고 다음날 아침 자즌바위골이 끝나는 지점까지 또 하루의 힘든 계곡등반을 해서 공룡릉의 급사면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다시 하루 비박했다. 벌써 만 7일이 지난 것이었고 따라서 예비일 2일간을 위한 비상식량만으로 공룡릉을 넘어 봉정암에 도달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공룡릉 사면을 올랐다. 그런데 계곡의 얼은 냇물이 끝나는 지점부터 사면이 급해지고 잡목과 넝쿨들로 덮여 있고 1m 이상의 신설이 쌓여 있어 설피 사용이 불가능했다. 설피를 벗어 배낭에 달고 허벅지까지 때로는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온몸으로 헤쳐가면서 급사면을 올라야 했다.


그런데 우리 발목을 잡는 복병이 있었다. 바로 눈 속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 잡목 가지들과 넝쿨들이었다. 눈 속에 있는 넝쿨에 발이 걸리면 마치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애를 먹었고 숨겨진 가지에 몸이 걸리면 그것을 타고 넘어야 했다. 나무를 타고 넘으려다 균형이 잘못되면 뒤로 자빠지면서 눈 속에 처박히곤 했다. 이렇게 수없이 자빠져 넘어졌고 그때마다 일어서기 위해서 용을 써야 했다.  


▲ 100미폭 상단부 빙벽 등반 중인 필자.

하루 종일 올랐는데도 아침에 출발한 지점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하루 종일 고군분투한 결과가 불과 100여m 정도를 오른 것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지도 않았고 열심히 정말 열심히 올랐는데 그 모양이었다. 또 다른 형태의 다람쥐 쳇바퀴였다. 원래 능선까지 올라 하루 비박하고 다음날 가야동계곡을 가로질러 봉정암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중턱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해가 저무니 하는 수 없이 급사면 중간에서 또 하루를 비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눈을 다져서 노출된 사면에 평탄한 비박지를 만들어야 했고 따라서 아늑한 계곡 속에 폭 파묻힌 비박이 아니라 밤새도록 폭풍설 속에 노출된 상태에서의 비박이었다. 무척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날씨가 그렇게 사납지는 않았다.


다음날 해질 무렵에야 겨우 공룡릉 능선에 도달해서 다시 비박하니 예비 2일분 비상식량마저 모두 동나버렸다. 다져지지 않은 설사면을 오른다는 것이 그토록 힘들 줄이야 차라리 빙벽이나 암벽을 타는 것이 오히려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유일한 소득이었다.


네 발로 기어서 밤늦게야 겨우 봉정암에 도착


능선에서 다시 비박하고 다음날은 비상식량도 떨어져 종일 굶은 상태로 공룡릉을 내려가서 가야동계곡을 가로질러 봉정암으로 길을 잡았다. 깊지 않은 계곡을 타고 내리고 오르는 코스라 별 위험은 없었지만 힘은 꽤 들었다. 더구나 며칠 동안 힘겨운 등반으로 지친 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우리 모두는 녹초가 되어 거의 네 발로 기어서 밤늦게 겨우 봉정암에 도착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무거운 짐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야말로 실신 일보전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푸짐한 식량을 가지고 2차 등반을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백인상이 이끄는 후발대가 단 한 명도 없이 봉정암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스님 몇 분이 있어 우선 쌀을 꾸어서 저녁을 해먹을 수 있었다. 2일간 비상식 그리고 만 하루 동안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도 제대로 못 마신 상태였으니 우리 모두는 열흘 굶은 거지보다 더 거지 상태였다. 게걸스럽게 저녁을 먹자마자 대부분 혼수상태로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도 일어나질 않았다. 아니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후발대 일도 궁금하고 우리의 식량 문제도 풀어야 하고 어차피 누구인가는 용대리까지 나가 보아야 하는데 아무도 일어나질 않고 마치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누워서 꼼짝도 하질 않았다. 후배들 중 나보다 덩치 좋고 힘 좋은 놈들이 꽤 있었건만 이런 비상상황에서는 아무 쓸모없었다. 나는 대장으로서의 원죄를 스스로 수행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조그만 배낭에 옷가지 몇 개만 넣고 아이젠을 차고 피켈을 들고 혼자서 길을 나섰다.  <계속>


필자소개 백인섭 산악인(요델산악회)
학력경력 서울 출생, 경복고, 서울대 공대(전기공학), 한국과학기술연구소(선임연구원), 카이스트(전산학석사), 프랑스 IMAG(전산학박사), 데이콤(초대연구소장), 아주대 정보통신대(교수). 
등반경력 개척초등등반(도봉산 :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등. 설악산 :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자즌바위골 등)
등반외 취미활동 스키, 테니스, 윈드서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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