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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글을 쓰게 된 이유
나의 작은 거산 설악산 이야기의 전개는 우선 1960년대 설악산에서 내 스스로 이루어낸 등산 활동 중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범봉 연봉, 동원암, 자즌바위골 등 대표적인 초등개척에 대한 개괄적 기록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각각의 활동 중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내 마음속 깊이 감성적 충격으로 깊게 각인되어 생생하게 돌이켜볼 수 있는 이야기들로 이어진다.
- ▲ 1 설악산 칠형제봉을 등반 후 정상에 앉아 천하독존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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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척 당시 발생한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기록하는 개척일기가 아니라 개척 당시 내가 실제로 체험했던 것 중 아주 특별한 사건들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체험한 감동이나 깨달음에 대한 등반기다. 그래서 내게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이고 어찌 보면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산에 미쳐버린 듯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각의 사건들이 당시 이 땅에서 산악문화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분석해 보고, 현재 이 땅의 산악문화에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 음미해 보면서 새삼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연계시켜 본다.
그동안 내가 이 땅에서 찾아내 초등하고, 개척한 모든 등반길과 그 당시 등반행위는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남들에 의해서 그들의 잣대로, 어쩌면 획일화된 잣대로만 평가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나 평가는 원래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때론 축소되고 때론 과장되고 때론 각색되게 마련이고 또한 그들의 수준만큼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 암벽등반 코스에 매겨져 있는 등급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등반행위 중 일부분인 오름 행위의 육체적 난이도에 의해서만 평가된 것이다. 이는 전통적 모험등반 코스가 단지 스포츠적으로만 축소 평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전통적 모험 등반에서의 등반성에 대한 등급체계도 존재하지만 이 땅에서는 잘 활용되지 않고, 스포츠 클라이밍의 등급만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원래 전통적 모험 등반으로 개척되었고, 이후에도 전통적 모험등반 대상이었던 많은 암벽길이 요즘엔 스포츠클라이밍대상으로만 왜곡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왜곡된 등반길에서는 더 이상 전통적 모험 등반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 ▲ 2 설악산 동계등반에 나서서 비선대 위 천불동계곡 빙판 위에 선 필자 일행.(1960년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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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왜곡 말고도 설악산 석주길에 얽힌 이야기처럼 꾸며진 이야기들이 사이버 공간을 타고 전설처럼 퍼지고 굳어져 때론 오히려 진실을 부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심지어는 고의적인 거짓 또는 와전에 의해서 개척자나 개척동기 및 과정 등이 엉뚱하게 둔갑하기도 한다. 따라서 내가 이 땅의 작은 거산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망각되어 버리기 전에, 또는 전혀 다른 것으로 왜곡되어 버리기 전에 그 활동의 주체였던 내가 나 자신의 고유한 잣대로 그것들을 정리하고 분석 평가해 봄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 보고,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남기고자 한다.
이 글들이 일면 이 땅의 등반사의 한 장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서는 지나치게 강력한 도구와 기술에 의해서 부분별로 지나치게 전문화된 등반형태(암벽등반, 빙벽등반, 스포츠클라이밍, 산악스키 등), 그리고 이로 인해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지나치게 조직화(분업화)된 거산 등반형태, 지나치게 상업적인 등반형태, 지나치게 스포츠적인 등반형태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 등반문화의 와중에 휩쓸리고 있는 이 땅에서 전통적 모험등반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에서다.
설악산이 작은 거산인 이유
처음엔 그저 설악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바라만 보아도 한없이 행복했다. 그래서 보고 싶을 때마다 수없이 그 산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그 산을 만지며 느끼고 싶어졌다. 그래서 고난과 위험에 뒤엉키면서 그 산을 만지고 비비며 마음으로 느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설악산 속에 있으면 문득 인간세계로부터 해방되는 달콤함을 느꼈다. 그래서 때론 그 산은 인간세상으로부터 탈출해서 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산을 높이로만 본다면 설악산(대청봉 1,708m)은 대충 유럽 알프스(몽블랑 4,807m)의 절반쯤에 해당하고, 유럽 알프스는 히말라야(에베레스트 8,848m)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리고 요즘 거산(巨山)등반이라고 하면 최소 유럽 알프스 정도에서 최대 히말라야에 이르기까지의 등반을 말하는 게 상식이다. 따라서 그것의 절반 내지는 반의반 수준의 설악산을 거산이라고 부르면 웃기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1960년대 당시 설악산 등반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요즘의 거산등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거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 ▲ 3 동계등반시 요긴하게 썼던 군용 천막(1960년대 초까지, 중반 이후는 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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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성 측면: 미지성, 위험성, 처녀성
당시 설악산 그 속에는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었고, 나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있었고, 또 나의 한계를 극복해도 전혀 불가능한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또한 당시 설악산은 몇 곳을 제외하면 모두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미지의 세계로서 무수히 많은 처녀봉들과 처녀계곡들이 있었다. 그리고 산 전체가 주로 암석으로 이루어졌고 험준한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 ▲ 1 눈 덮인 만장봉 바둑바위를 오르고 있는 필자. 2 칠형제봉의 침봉 위에 올라앉은 필자와 이형삼. 3 범봉 정상에 올라선 필자. 4 칠형제봉 암릉에서의 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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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4계절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기후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거산들이 갖는 여러 가지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었다. 수많은 바위 봉과 절벽과 계곡이 있어 항상 추락과, 낙석·낙반의 위험에 노출되고 겨울에는 폭설로 눈사태의 위험에 노출된다. 산세가 험해서 거의 모든 등반코스는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는 길인데, 계곡이 바위협곡이기 때문에 폭우가 오면 금방 물이 불어 급류로 변하고 길이 끊기게 된다. 따라서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는 위험에도 노출된다. 따라서 설악산에서의 등반은 일반적인 산의 위험뿐만이 아니라 급류이라는 전혀 다른 어려움까지 극복해야 가능했다.
또한 당시 설악산에는 곰과 같은 맹수뿐 아니라 총을 가지고 있는 무장공비까지 출현했던지라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험성이 배가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과 위험이 담보된 모험성과 경이로운 경치가 담보된 탐미성,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담보된 신비성과 창의성 등으로 해서 설악산 등반은 요즘 거산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모험등반에 비해서 전혀 손색없는 모험적이고 창조적인 등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즘의 거산등반이 많은 경우 지나친 도구와 수단을 사용하고 또한 지나치게 조직화되고 또한 지나친 정보지원을 활용함으로써 전통적 등반에서의 모험성과 창의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한계까지이기에 설악산이든 유럽 알프스든 또는 히말라야든 내게는 모두 다름없는 거산이었다. 다만 알프스나 히말라야같이 높은 산에서는 가장 쉬운 길로의 등반도 인간 능력의 한계선상에 있기 때문에 전통적 모험등반성이 쉽게 보장된다. 반면에 우리나라처럼 낮은 산에서는 가장 어려운 길을 찾아 오르든지 아니면 어떤 핸디캡을 안고 등반을 해야만 인간 능력의 한계선상에 도달해 비로소 전통적 모험등반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른바 등로주의적 등반방식이나 원시적(?) 등반방식(소위 자유등반 방식)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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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기간 측면
당시 설악산 등반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설악산 자체가 규모나 형상에서 작지 않은 산이고 더구나 당시는 지금 같은 등반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내설악으로 접근하든 외설악으로 접근하든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르고 내려오려면 산에서만 최소 1주일 정도 걸렸다. 그리고 서울 마장동에서 새벽에 시외버스를 타면 저녁이 돼서야 속초에 도착했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시외버스를 타고 설악동으로 들어가는 데 또 반나절이 걸렸다. 따라서 설악산 원정등반은 짧게는 10일 정도, 길게는 보름 정도의 기간을 요했다. 등반에 10일 이상 소요된다면 충분히 요즘 거산등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 5 설악산에서 바위굴을 이용한 설동을 만들고 있는 요델산악회원들. 6 1960년대 당시의 취사장비는 항고가 전부였고, 무게 때문에 버너는 있어도 지고 다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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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장비·식량 측면
군용제품은 원래 야전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등반용으로서의 활용성이 좋았다. 더구나 미국 군인용 제품이기에 견고성이나 방풍성, 방수성 등 품질면에서는 매우 우수했다. 그러나 문제는 무게였다. 당시는 가볍고 질긴 나일론 섬유가 없었기에 모든 의류가 두꺼운 면류였고 또한 천막도 두꺼운 원단으로 만든 것(군용 A텐트)이었고, 방수천이 없어 반드시 무거운 군용 판초우의를 사용해야 했다. 카라비너 같은 것도 가벼운 듀랄루민이 아니고 무거운 무쇠였다.
10일 이상 산속에서 지내야 하니 그동안의 의식주를 위한 장비를 모두 챙기면 각자 대충 50kg 이상의 짐을 져야 했다. 당시는 인스턴트식품뿐 아니라 등반용 의류나 천막 같은 것들도 전무했다. 국산은 물론이지만 외국산 조차 전혀 수입되지 않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등반 시 의식주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미제 군용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각종 군복들(속내의에서 가죽점퍼까지), 군화, 오버슈즈, 장갑, 모자, 판초우의 등이 등산복으로, 그리고 군용A텐트, 닭털 침낭(내피와 외피까지), 에어매트리스, 야전삽, 손도끼 등이 야영장비로, 군용자일과 카라비너가 등반장비로, 그리고 통조림, 건빵, 휘발유 버너, 코펠, 항고 등이 등산식량과 취사용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등반에 필요한 모든 것이 미제 군용제품이었고 남대문 시장에서 쉽게 비교적 싸게 구할 수 있었다.
- ▲ 1 설악산 천불동계곡에서의 급류타기 훈련(오세진). 2 급류를 건너는 훈련 중인 요델산악회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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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시 모든 원정등반은 짐 무게로 인해서 무거운 클라이밍 장비를 배제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워킹 위주의 등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각자 50kg 이상의 짐을 지고 10일 이상 험한 등반을 해야 했기에 충분히 거산등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워킹만 하는 그런 등반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산에 들면 워킹은 물론 암벽등반이나 설벽등반, 빙벽등반이나 또는 계곡탐험등반 같은 어려운 클라이밍을 가미해서 산의 모든 것을 즐겨야 했다. 따라서 내게는 몇 가지 등반철칙이 있었다.
첫째, 일단 등산을 하면 어떤 경우든(나의 육체적·정신적 조건이 어떠하든), 그리고 어떤 기후조건(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에서도 반드시 클라이밍을 한다.
둘째, 등반의 목표지점은 항상 봉우리여야 한다. 그 봉우리는 되도록 일반인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는 적막하며 고고한 미지의 봉우리여야 한다. 하늘을 빼고는 모든 것이 발아래 위치하는 봉우리, 거기엔 내려다보는 편안함과 아무런 억눌림이 없는 진정한 자유감이 존재하고, 그리고 무언가 신에 근접한 듯한 신성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우리에서 고독하지만 고고한 유아독존의 희열을 만끽한 후 하산한다.
셋째, 봉우리가 처녀봉이면 등정주의를 택하고 아니면 되도록 처녀 길을 택하는 등로주의를 취함으로써 모든 등반이 나의 한계선 상에서 모험성과 창의성을 가지도록 한다.
넷째, 산에서 잘 때는 항상 비박을 하고, 취사는 간편해야 한다.
다섯째, 모든 등반에서 반드시 사진기록을 남겨야 하며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등반 중에는 항상 사진기록을 남겨야 한다. 전문사진가가 부재하는 경우엔 내 자신이 그 일을 맡는다. 그리고 언제나 전천후 날씨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여름에 클라이밍 시에도 폭우를 맞으면 동사 위험이 크기 때문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설악산에서의 가장 빈번한 사고가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 대원이 급류타기 훈련과 휩쓸렸을 때의 대처방법을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 ▲ 3 잦은바위골 100미폭 등반 4 동계등반 장비를 갖춘 모습. 50킬로그램이 넘는 키슬링을 메고, 엉덩이깔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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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반 스타일
나의 이런 등반철칙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등반 시 짐의 무게였다. 워킹만 한다 해도 50kg 정도의 짐인데 거기에다가 자일, 무쇠 하켄, 해머, 무쇠 카라비너 등 무거운 클라이밍 장비까지 더해지면 짐 무게 때문에 등반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동계 적설기 등반 때는 아이젠과 피켈, 군용 라켓형 설피와 워커를 신고 그 위에 덮어 신는 고무장화 비슷한 오버슈즈까지, 그리고 아이스하켄까지 더해지면 짐이 엄청나게 무거워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등반방식을 고안해 냈다. 클라이밍 장비를 뺄 수는 없으니 다른 장비에서 무게를 줄여야만 했다.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가장 무거운 야영장비와 취사도구와 식량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1 자즌바위골 정찰을 위해 설피를 신고 등반 중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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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산에서 호화롭게 천막에서 자는 대신 항상 비박을 했다. 비박을 하면 또다른 장점이 있다. 계곡이건 봉우리건 능선이건 아무 데서나 한몸 눕힐 자리만 있으면 잘 수 있어 매우 편리했다. 또한 잠자리에서 하늘의 별을 셀 수 있어 더 없이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각종 호화로운 취사장비와 도구를 쓰는 대신 원시적인 모닥불과 항고만으로 취사하고, 먹기 위한 등산이 아니라 등산을 위한 먹기 개념으로 식량을 택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등반 중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신체 연료 보급’일 뿐이었다. 그래서 물을 많이 쓰는 밥 대신 떡국을 하루 세 끼 먹곤 했다.
그리고 폭우 속에서 불을 지필 수 있는 기술까지도 갖추어야 했다. 바로 자작나무 껍질이었다. 이렇게 유격대식으로 하면 짐 무게가 각자 10kg 이상 빠진다. 그러면 클라이밍 장비를 추가해도 각자 짐 무게를 40~50kg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모든 원정등반에서 며칠 동안 걷기만 하는 등반이 아니라 암벽등반이나 험한 계곡등반이나 설벽 또는 빙벽등반을 더불어 하는 혼합등반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이러한 등반 스타일은 매우 독특했기 때문에 흔히 우리를 보고 알프스 스타일 등반대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알프스 스타일 등반이 무엇인지, 히말라얀 스타일 등반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나의 등반철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등반 스타일은 언제나 전형적인 전통적 모험등반 방식이었던 것이다.
- ▲ 2 범봉연봉 등반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진 채 안자일렌을 하고 연속등반하고 있는 대원들. 이는 이를테면 1960년대 당시의 알파인 등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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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을 대하는 나의 마음 ‘경외감’
그러다가 이젠 그 산을 몽땅 가지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산이 가진 미지의 세계에까지 다가서게 되었다. 미지의 산은 두렵지만 그 신비성과 무결함으로 나를 더욱 매혹시킨다. 미지의 봉우리, 미지의 계곡, 미지의 벽들 그 속살 깊은 곳에 몸을 비빌 때 나는 마치 처녀의 옷고름을 풀 때처럼 신선감과 소유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지의 신비를 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때부터 산은 정복의 대상이었고 소유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더불어 극복의 대상이었다. 때론 예기된 위험에 목숨을 거는 모험도 감행했다. 요행을 믿고 덤비는 무모한 모험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당당하게 맞서는 그런 모험을. 그러자 그 산은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도 내게 전혀 낯설지 않는 나의 산이 되었다. 때론 내 소유와 남의 소유가 충돌하면 내 소유를 치열하게 지켜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소유의 고리도 삭아 없어져 버렸다. 산이 아주 내 속으로 들어와 그 산이 나고, 내가 그 산이 되어 버렸다. 그 후론 그 산이 더 이상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정복의 대상도 소유의 대상도 아니며, 대상이라는 객체가 아니라 바로 주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 한 가지 남다른 점은 죽으나 사나 그저 도봉산과 설악산에서만 살았다는 사실이다.
수백 번 같은 길을 오르고 내려도 싫증은커녕 오히려 점점 더 그것에만 빠져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나와 요델 멤버들은 도봉산과 설악산 말고 이 땅의 다른 산들은 거의 모르는 채 살았다. 그래서 남들은 의아해했다. 그토록 산에 오래 다녔으면 이 땅의 산들만으로는 모자라 외국의 명산들까지도 섭렵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고 언제나 똑 같은 산, 오로지 도봉산과 설악산밖에는 모른다는 사실에.
그건, 남들에게는 비록 1,000m도 안 되는 도봉산과 2,000m도 안 되는 설악산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두 곳에서 산의 모든 것을 찾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두 산에서 나는 산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인간의 근접을 허용하지 않는 무서운 벽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맛보기 수준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수준으로. 그러기에 나는 이 산 저 산 수박 겉핥기식 등반을 하는 낭비를 지양하고 한 곳에만 몰두해서 깊게 파고든 것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더 경이로워지는 그 무한의 깊이에 끝없이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히말라야 어느 베이스캠프도, 백두산도 그리고 금강산조차도 가본 적 없고 또 가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도봉산과 설악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바보스러울 정도의 일편단심을 나는 지금까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세상의 많은 이성들 중에서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면서 한없이 행복해하는 것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내게 가장 소중한 산을 아주 먼 곳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아냈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을 전혀 낭비하지 않으면서 알차게 그 산만으로도 산에서 산 산사람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내 스스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등반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나의 한계선 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항상 발아래 무서운 죽음을 깔고 있어,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엄격성과 완벽성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등반의 어려움과 위험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때론 명확하게 덮쳐 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손과 발이 딛고 잡는 것마다 그것이 바로 유일하고 동시에 완벽한 내 생명의 끈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런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든 나 자신을 가혹하게 담금질했다.
인간이란 원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등반행위는 태생적으로 모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런 가혹한 노력과 치열한 정신, 그리고 얼마간의 행운 덕에 나는 산에서 나 자신의 한계선 상에서 모험을 감행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남는 생존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성취의 뿌듯한 보람을 원하는 만큼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계속>
필자 약력
백인섭씨(71)는 1960~70년대 한국 산악계를 풍미한 산악인이다. 도봉산 선인봉의 대표적 암벽루트인 표범길을 비롯해 허리길, 양지길, 그리고 설악산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등을 개척등반했으며 한국 알피니즘의 주류를 이루었던 산악모임인 요델산악회를 창립하고 이끌었다.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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