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년 겨울의 자즌바위골 등반은 곧 거벽등반에 다름 아니었다
- 글·사진 | 백인섭 산악인 요델산악회
- <범봉의 발견>
[연재 | 산을 말한다 | 설악산 개척등반기: 범봉을 찾아서 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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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에 미쳤던 시절엔 틈만 나면, 또는 무슨 핑곗거리만 생기면 나는 산을 찾았다. 어쩌다가 산을 거르게 되면 당장 벼락이라도 맞아 죽을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예외 없이 산을 찾았다. 어차피 인생사는 선택이고, 그 선택은 우선순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고 내게는 언제나 산이 최고의 우선순위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가장 멋진 것은 가장 깊고 먼 곳에
초창기의 내게는 도봉산이 산의 전부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도봉산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곤 했는데 항상 무언가가 조금 모자란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바로 등반 규모였다. 도봉산에서는 어떤 코스를 잡든지 당일치기로 봉우리까지 올랐다가 내려올 수 있기 때문에 등반 규모 차원에서 나는 항상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금방 나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설악산이었다. 물론 높이가 도봉산의 갑절 이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당시 설악산을 등반하려면 짧아도 일주일 정도고 보통은 열흘 정도, 길게는 2주 정도를 거칠고 험한 산속에서 지내야 하는 그런 규모의 등반이었고 무엇보다 탐험적이고 모험적인 요소가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방학 때는 물론이고 징검다리 휴일이 끼어 일주일 정도만 시간을 낼 수 있으면 공부고 일이고 다 제치고 무조건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그 덕에 남들보다 갑절 걸려 대학을 졸업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전혀 후회는 없었다.
- ▲ 1967년 2월, 자즌바위골 등반을 대비한 훈련이었던 권금성 설벽등반.
- 1960년대 초반의 설악산 등반은 봉우리나 벽 등반이나 암릉 등반이 아니라 주로 계곡 등반이었고, 드물게 주릉 종주등반의 형태였다. 당시에는 그 길들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다리나 바위 절벽을 오르고 내리는 철사다리 또는 고정 밧줄 같은 것들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산장이나 대피소 같은 것들도 전혀 없이 원래의 자연 그대로였다. 따라서 등반기간 동안의 의식주를 위한 모든 장비와 식량과 등반 장비까지 각자 지고 다녀야 했으며 식량이나 장비 등은 매우 원시적이라 크고 무거웠다. 때문에 계곡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도 꽤 힘들고 위험한 등반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종주를 해내려면 최소 일주일 내지는 열흘 정도가 소요됐고 그것도 40~50kg 정도의 무거운 짐을 메고 해내야 했다.
암벽 등반은 여름방학 원정 등반 시 설악동에 짐을 풀고 울산바위 암벽을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당시 이 땅의 산꾼들에게 친숙한 서울 근교의 선인봉과 인수봉 바위처럼 장년기의 견고한 화강암이었고, 무엇보다 무거운 원정 짐을 설악동에 남겨두고 서울 근교 산처럼 당일치기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울산암에 새로운 길 2개 개척했지만…
나도 설악등반이 끝날 때마다 울산바위를 찾아 암벽등반을 즐겼고 새로운 길도 2개 개척했다. 그러나 울산바위에서의 암벽등반은 늘 무언가가 부족해서 아쉬운 마음이 들곤 했다.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봉우리의 형상 때문이었다. 거기엔 고고하게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가 없었다.
그리고 설악동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바위 봉들은 노년기 바위로서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아예 암벽등반 대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토왕성폭포나 대승폭포 같은 것들도 그저 바라만 보면서 경탄하는 대상이었을 뿐 등반대상으로서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범봉 같은 멋진 독립 암봉이, 그것도 처녀봉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나 석주길 같은 날카로운 멋진 암릉(나이프 리지)들이 우리의 산에서 태곳적 모습으로 우리 등반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토록 멋진 것들이 등반대상이 되기는커녕 그 수려한 모습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외설악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외설악을 관통하는 등반길이라고는 오직 천불동 계곡 길밖에 없었고, 거기에 들어서면 양쪽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해서 시야가 꽉 막혀 버려 외설악의 그 화려한 암봉과 암릉들은 모습조차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제일 중요한 등반 목적이 산의 아름다움과 태초의 신비와 순수함을 찾아 즐기려는 것이었기에 어딜 가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특출한 것들을 찾으려 애썼다. 때문에 결국 그런 것들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 1966년 어느 여름날 무거운 원정 짐을 메고 힘겹게 소청봉에서 천불동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내리막길에서였다. 짙고 무거운 구름이 외설악을 온통 뒤덮어, 구름의 바다가 아니라 구름의 설원을 이루고 있었다. 내게 눈썰매가 있고 그걸 끌어 줄 순록이 있다면 그걸 타고 그 위를 달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순간적으로 그 속에서 문득 모습을 드러내곤 다시 금방 운해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외설악의 암봉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내 시야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흡사 다도해의 경치 같았다. 모든 것들은 구름 속에 파묻히고 오직 높은 암봉들만 구름을 뚫고 뾰족뾰족 여기저기에서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그중에 유별난 암봉 하나가 있는 듯싶었다.

- <한 순간 외설악을 뒤덮고 있는 운해를 뚫고 치솟아 오른 바위봉(범봉) 자태>
나는 즉시 가던 길을 멈추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재빨리 근처에서 시야가 좀더 잘 트인 지점을 찾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며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정말로 남달리 수려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는 독립 암봉 한 개가 운해 위로 다시 떠올랐다. 그리곤 금방 다시 사라졌다.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릉 중간쯤에는 여러 개의 바위봉들이 한데 어우러져 사납게 솟아 있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홀로 외설악 쪽에 우뚝 솟아 외설악의 수많은 바위봉들을 거느리면서 그 위에 왕중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그 모습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순간 ‘바로 저기가 진짜 외설악이고 저 바위 봉이 바로 내가 찾는 외설악 최고의 멋진 암봉’이며 따라서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암봉’이라는 생각에 설렘과 탄성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비록 먼발치에서 얼핏 보았지만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느끼기에는 족한 그런 장면이었기에 그 모습은 내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이렇게 나는 설악에서 가장 준수한 암봉과 첫 선보기를 가졌던 것이었다. 아주 먼 발치에서 아주 잠깐. 그리고 그것에 매료되어 죽기살기로 찾아나서서 끝내는 찾아 내었고 그리고 거기에 내 몸을 비벼대면서 봉우리에 올랐고 그리고 범봉이라고 이름하여 부른 것이다.
눈이 쌓일 때를 기다리자!
그것은 북한산 인수봉을 빼닮은 모습이었다. 그 윤곽이 날카롭게 각지지 않고 부드럽게 둥그런 형상으로 보아 바위 질도 틀림없이 장년기 화강암으로서 암벽등반에 이상적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내 맘속 깊은 곳에서 그것을 찾아올라 보아야겠다는 등반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그건 마치 늘 보아 오던 도봉산 선인봉 전면 벽의 깨끗한 공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허리길이나 표범길을 찾아내었을 때의 기분과 같았다.
나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짐을 지고 하산을 시작하자 그 암봉은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설악동에 도착할 때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아무리 그쪽을 살펴보아도 그 암봉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소청 내리막길에서 나무 사이로 잠시 동안만 내게 그 매력적 모습을 흘끗 보여 주고는 수줍어 다시 설악산 깊은 속으로 숨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암봉을 찾아 내 몸을 비벼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외설악의 가장 깊은 속에 숨겨져 있어 그 근처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 접근로를 우선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어렵게 외설악 지역 지도를 모두 구했다. 당시 일반에게 판매되는 지도는 5만분의 1 지도로서 바위 봉이나 절벽을 판별해 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렵게 2만5,000분의 1지도를 구했다. 정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대충 그 암봉의 위치를 잡아냈고 거기에 이를 수 있는 계곡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계곡은 비선대와 귀면암 사이에서 화채봉 반대쪽, 즉 서쪽으로 뻗은 두 번째 계곡으로 위치상으로는 외설악의 심장부를 꿰뚫고 공룡릉에 이르는 계곡이고, 등고선 상으로는 매우 좁고 경사가 급한 계곡임을 알 수 있었다. 계곡 상단에서 공룡릉이 시작되기 좀 전에 오른쪽으로 오르면 그 봉우리 발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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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등반 때 설악동 원주민인 약초꾼들과 사냥꾼들에게 그 계곡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거기는 우리들도 못 들어가는 설악에서 가장 험한 계곡이고 하도 바위가 많아 ‘자즌바위골’이라 부른다”며 당시 설악산 일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실탄 한 트럭’(수많은 사냥꾼들로부터 실탄 한 트럭분을 얻어맞고도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어 붙여진 별명)이라는 무서운 곰은 물론 어쩌면 호랑이까지도 바로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을지 모른다고 이구동성이었다. 그곳으로 등반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위험할 것이라 겁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유혹과 도전욕이 느껴졌다. 거기야말로 태초의 순수함과 신비가 존재하며, 내 혼신을 다해야 할 모험적이고 창조적인 도전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계곡으로 오를 것을 결심했다. 우선 본격 등반에 앞서 정찰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길이 없는 험한 바위협곡을 무거운 짐까지 지고 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계곡 바닥으로 물줄기를 따라 타고 오르는 수밖에 없다. 가다가 바윗덩이에 막히면 그걸 타고 올라야 하고 때론 계곡 양쪽 바위절벽을 타고 올라야 되는데 계곡바위는 습기 때문에 미끄러지기 쉽고 자칫 깊은 소로 빠져 버릴 수도 있다. 무겁고 커다란 짐을 지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동계 적설기에 오르는 것이었다. 계곡물이 얼어붙으면 깊은 물이나 급류에 휩쓸릴 위험이 없어지고 더구나 그 위로 편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계곡에 눈이 많이 쌓이면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쌓인 눈으로 평평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해 겨울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차례의 폭설이 내려주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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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즌바위골 제1차 정찰등반
·일시: 1967년 2월
·대원: 백인섭, 강길건, 하양도, 김진성
동계 적설기 자즌바위골 탐험등반을 위해서 나는 팀을 조직했다. 팀원은 나, 그리고 동료인 강길건과 하양도, 후배인 김진성이었다. 그들과 필요한 등반장비들을 준비했다. 각자 동계등반을 위한 방한 의류, 신발로 군화 위에 덧신 형태로 착용하는 고무장화(당시 생선장수 신발이라 불렀음), 야영장비로 닭털침낭과 내피 및 외피, 에어매트리스, 그리고 군용 A천막과 휘발유 버너, 취사도구 등을 남대문시장 군용품가게에서 구입하고 8발짜리 아이젠과 피켈을 남대문시장 마포 할아버지한테서 구입했다. 적설기 필수장비로서 눈 위를 걸을 수 있는 미제 군용 라켓형 설피도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했다. 그리고 식량을 준비하고 자일 등 등반장비를 갖추니 각자 짐 무게가 무려 60kg 정도 되어 혼자서는 지고 일어설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 짐을 지고는 평지 길도 걷기 힘겨운데 더구나 험한 자즌바위골 계곡을 어찌 오르고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짐의 무게를 40~50kg 정도로 줄여야 했다. 클라이밍 장비를 줄일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대상은 야영장비와 취사장비와 식량이 되었다. 천막 등 주거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비박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료와 버너, 각종 취사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모닥불과 군용 항고(반합)만을 사용하고, 식량도 밥 대신 떡국만 먹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각자 짐 무게를 10kg 이상씩 줄일 수 있었다.
연습 훈련등반 동계 적설기 권금성 직벽 등반
다음해 겨울(1967.2)에 기다리던 폭설이 여러 차례 왔다. 우리는 기다리던 자즌바위골 탐험등반을 위해서 마장동으로 가서 여인숙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새벽 속초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저녁에 속초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버스를 타고 설악동에 도착하니 그동안 누적된 눈이 산더미처럼 쌓여 설악동의 집들이 눈 속에 모두 묻혀 있었다. 사람들은 좁다란 눈의 골짜기를 만들어 이웃과 겨우 왕래할 정도였다. 따라서 울퉁불퉁한 설악동 계곡이 쌓인 눈으로 평평해졌다. 바로 기다렸던 기회가 온 것이다.
▲ 권금성 상단부의 빙벽을 스텝 커팅하며 오르는 필자

미지의 험한 자즌바위골 정찰등반에 앞서 우리는 생전 처음 사용하는 라켓형 설피 사용기술과ㅤ피켈로 스텝 커팅하면서 오르는 기술, 8발짜리 아이젠 사용기술, 그리고 어렵게 구한 일제 앵글형 아이스하켄 사용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하루 동안 설악동에서 훈련하기로 했다. 대상으로 권금성 직벽을 택해서 올랐다. 왜냐하면 권금성 직벽의 하단부에서 중단부까지의 잡목지대가 폭설에 덮여 평탄한 설사면을 이루고 있어 라켓형 설피를 신고 러셀하며 오르는 훈련에 적합했고, 중단부 이상에서는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여기저기에 빙벽 또는 설벽이 형성되어 있어 피켈과 아이젠을 사용한 설벽이나 빙벽 등반을 연습하기에 아주 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단하게 클라이밍 장비만 챙겨서 지고 난생처음으로 미군용 라켓형 설피를 신고 손에는 피켈을 들고 평탄해진 설악동 계곡을 너무나 쉽고 편하게 가로질러 권금성 직벽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보통 신발의 몇 갑절 크기의 라켓 설피를 양 발바닥에 매달고 걸으려니 처음엔 매우 불편했다. 다리를 넓게 벌려야 하고 걸을 때도 넓게 걸어야 했다. 처음엔 그게 잘 되질 않아 서 있을 때는 두 설피가 겹치고 걸을 때는 두 설피가 자꾸 서로 걸려 넘어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금방 설피 신고 걷는 요령을 터득했고 그것에 익숙해졌다.
설사면을 좀 오르니 경사가 급해지면서 또한 쌓인 눈이 점점 단단해지면서 설피가 먹히지 않고 자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그래서 설피를 벗고 대신 8발짜리 국산 아이젠을 부착하고 걸으니 아이젠 발톱이 사면에 저절로 콱콱 박히면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흡사 만년설 지대처럼 기막힌 설사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올라 중턱쯤에 이르니 사면이 가팔라지면서 눈과 얼음이 섞인 벽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안자일렌하고 선등자인 내가 피켈로 스텝 커팅을 해가면서 올랐다. 경사가 급해서 확보가 필요한 경우에는 나무를 찾아서 슬링을 걸고 확보를 했고 적절한 나무가 없는 경우에는 앵글형 아이스하켄을 얼음벽에 박아 확보한 후 빌레이를 받으며 후등자가 오르면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리곤 다시 그리로 하강했다. 이 등반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동계 설벽 및 빙벽 등반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설피 사용법, 아이젠 사용법, 피켈 사용법 등 필요한 동계적설기 등반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권금성 직벽에서의 우리의 훈련등반 자체도 어쩌면 권금성 직벽 초등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 ▲ 겨울 자즌바위골 초입. 적설량이 엄청나서 설피를 신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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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등반 동계 적설기 자즌바위골 정찰등반(실패)
다음날 아침 일찍 설악동을 출발해서 비선대, 설악골 입구를 지나 자즌바위골까지 계곡 한가운데로 설피를 신고 아주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리고 커다란 설피를 신고 걸어야 했기 때문에 걸음 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오후 늦은 무렵에 우리는 자즌바위골 초입에 도달했다. 조금 이르지만 거기서 야영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험준한 자즌바위골 등반을 시작하기로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비박지를 찾는데 마침 커다란 바위 밑에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열린 굴 형태로 형성되어 있었고 바닥도 눈 한 톨 없이 바짝 말라 있었으며 누울 수 있게 평평했다.
굴 입구만 눈으로 적당히 막아 주면 아늑한 동굴집이 될 듯싶었다. 우리는 바로 옆에서 쌓인 눈을 벽돌처럼 떼 내어 굴 앞면에 벽을 쌓았다. 금방 기막힌 설동 한 채가 만들어졌다. 난생처음 지어본 설동이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바람 한 점 없이 아주 아늑했다. 설동 밖에 모닥불을 피우고 군용 항고로 눈을 녹여 떡국을 끓여 먹은 후 항고 커피(항고와 모닥불에 끓이는 커피) 한 그릇씩(컵이 아니라 밥그릇에 가득 담은 커피)을 마시고는 각자 자신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잠자리 만들기에서 가장 힘든 일은 군용 에어매트리스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숨이 턱에 차고 얼굴에 시뻘건 핏대가 서야 비로소 매트가 탱탱해졌다. 그것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피와 외피까지 갖춘 군용 닭털침낭을 펴고 그 속으로 누에처럼 기어들어갔다. 배고프고 바닥이 배기고 추위에 떨어야 하는 처량한 나그네의 잠자리가 아니라 아주 푹신하고 편안하고 포근한 호사스러운 잠자리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드디어 자즌바위골의 좁은 입구로 들어섰다. 몇백 미터를 오르니 계곡이 폭포 빙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한 10m 정도의 수직 빙벽 위로 다시 좁은 바위계곡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성채의 관문 같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자즌바위골을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를 이해했다. 자즌바위골은 입구부터가 일반 사람들은 들어설 수 없도록 수직의 폭포로 가로막히고, 그 위로 좁은 바위협곡으로 들어서야만 갈 수 있는 그런 비밀스러운 계곡이었다.
그런 계곡을 오른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어려운 암벽 또는 빙벽등반으로서, 더구나 무거운 원정 짐을 지고, 그것도 미지의 개척 등반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 ▲ (위)자즌바위골 초입의 암반 위에 올라선 세 대원. 등에 멘 배낭의 평균 무게는 40~50kg이었다. / 자즌바위골 폭포를 우회하기 위해서 설악골 쪽 능선으로 오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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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그런 수직빙벽을 오르려면 하켄을 연달아 설치하면서 오르는 인공등반 방식이 될 수밖에 없어 10개 정도의 아이스하켄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수직빙벽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하고 그저 확보용으로 3개만 준비했으니 자즌바위골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대신 설악골 쪽으로라도 좀 올라 볼 작정으로 나는 설악골 쪽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조금 오르자 사면의 경사가 급해지고 눈이 단단해서 사용이 불가능해진 설피를 벗어 등에 지고 올랐다. 급사면에는 여기저기 눈덩이가 형성되어 매달려 있었다. 그중 한 개를 잡고 오르려고 붙잡는 순간 그 눈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눈덩이를 잡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나를 밀쳐내고는 밑으로 굴러 떨어져 내렸다. 엄청난 무게였다.
나는 황급하게 ‘낙석’ 하고 외쳤다. 내 뒤를 따라서 올라오고 있는 대원들이 눈덩이를 피하도록. 다행히도 눈덩이가 우리 대원들을 피해서 밑으로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눈덩이가 돌덩이만큼이나 무겁고 단단해서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능선에 오르니 엄청나게 눈이 쌓여 있었고 다져지지 않은 상태라 걸을 수 없어 다시 설피를 신어야 했다. 설피를 신고 능선을 넘어서 조금 내려서니 경사가 다시 급해져서 설피 신고 걷기가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대충 2부 능선쯤에서 발에 고정되어 있는 설피를 겹치게 해서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 바로 썰매를 타기 위해서였다. 양 손에 쥔 피켈로 설사면에 쌓인 눈을 밀어내면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내가 밀어내는 눈더미가 빠르게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순식간에 내 설피 썰매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빙판 위에 덮여 있던 눈을 내가 쓸고 내려가는 바람에 밀려 내리는 눈이 어느 순간에 눈사태로 변하면서 눈이 급사면으로 쏟아져 내리고 빙판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대충 100m 이상을 정말 쏜살같이 눈 덮인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뜻밖의 상황이었다. 밑에 깔고 앉은 설피에 내 두 발이 매여 고정되어 있고 등에는 무거운 짐이 나를 누르고 있는 바람에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반 누운 자세로 마치 경기용 눈썰매를 탄 것처럼 미끄러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계곡 경치가 마치 달리는 열차의 창밖 풍경처럼 빠르게 내 양쪽을 스치며 지나갔다. 다행히도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 한참을 거의 직선으로 미끄러져 내리다가 산 중턱쯤에서 방향이 저절로 틀어졌다. 그런데, 계곡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고 나는 바로 그 나무를 향해서 돌진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 몸과 발이 꼼짝달싹할 수 없게 묶여 있어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은 그 나무에 쾅 하고 부딪치면서 내 몸은 공중에 떠서 날았다. 나무에 가슴을 부딪치는 바람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나무에 부딪치면서 등에 진 무거운 기스링과 두 발에 고정되어 있던 설피가 벗겨져 날아가 버렸고 손에 잡고 있던 피켈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덕에 내 몸은 설사면을 곤두박질치면서 한참을 구르다가 깊은 눈 속에 처박히면서 멎었다.
- ▲ 능선에서 설악골 쪽으로 하강 중 슬립한 상황을 묘사한 당시 필자의 그림.
- 도봉산 신령과 설악산 신령은 형제가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떼굴떼굴 구른 바람에 막힌 숨이 저절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눈 속에 처박혀 누운 채 내 몸을 점검해 보았다. 다행히 피는 보이지 않았고 사지도 멀쩡하게 붙어 있었고 쑤시거나 아픈 곳도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산 위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서 고함을 질렀다. 설피를 깔고 미끄럼 타지 말라고. 내 뒤를 따르던 대원 모두가 나처럼 미끄러져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한참 후에 대원들이 눈을 헤치며 걸어서 내려왔다. 내가 순식간에 미끄러져 없어지는 것을 보고 바로 썰매타기를 중지하고 설피를 벗고 걸어 내려 온 것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눈 속에 묻혀 있는 피켈과 설피와 배낭을 찾아서 다시 짊어지고 하산을 시작했다.
설악골로 내려섰지만 상부로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설악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로써 자즌바위골 정찰등반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자즌바위골은 시작부터가 아주 험상궂어, 겨울보다는 차라리 봄철에 본격적인 암벽등반으로 탐험할 것을 다짐하면서.
나는 또 한 번 죽다 살아났다. 이번에는 도봉산 신령이 아니라 설악산 신령께서 날 살려서 돌려보내 준 것이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다음에 다시 오라고. 아마도 도봉산 신령과 설악산 신령 그분들은 형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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