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을 말한다 | 설악산 범봉 개척등반기 ② ]
- 원시의 바위는 내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자유공간이었다
- <ul id="author"> <li>글·사진 | 백인섭 산악인 요델산악회
- http://blog.naver.com/paikinsup.do
기자의 다른 포토보기 </li></ul> -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군계일학의 미인’ 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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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봄에 나는 클럽에서 힘도 좋고 등반기술도 좋은 정예 클라이머인 유충길, 장승복과 함께 단출하면서도 막강한 팀을 구성해 본격적으로 자즌바위골 계곡탐험등반을 재시도했다. 바로 동계 적설기에 정찰탐험을 하려다 실패하고 물러선 지 석 달 만이었다. 이번에는 암벽등반하기 가장 좋은 시기이고 팀도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한 팀의 자일파티라서 암벽등반 위주로 계곡을 탐험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최종 목적은 그 아름다운 독립봉을 찾아서 그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일주일치 식량과 비박장비, 클라이밍 장비로 자일 2동과 적당량의 하켄과 카라비너, 그리고 해머와 숲을 헤쳐 나갈 때 사용할 나다(칼) 등으로 무장한 우리의 짐은 각자 40~50kg이었다. 톱을 서야 하는 나는 다소 가볍게 짐을 지고 우리 모두 비장한 각오로 등반을 시작했다.
- ▲ 범봉 초등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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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 5월 28일 안개 : 백인섭, 유충길, 장승복
본격 등반에 앞에서 울산바위에서 몸 풀기본격 등반에 앞서 몸도 풀 겸 그리고 새로운 암벽코스도 하나 개척할 겸해서 우리는 울산바위를 향했다. 계조암에 당도해 흔들바위를 흔들어보고 마침 흔들바위에 말 엉덩이처럼 불룩한 사면이 있어 그 위를 두 팔로만 찍어 누르면서 말 타기 자세로 오르는 어려운 동작을 시도해 보았다.
얼마 전 도봉산 선인봉 십자로 직상코스를 등반하던 중에 말 엉덩이같이 불룩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는데, 박쥐코스를 선우중옥과 함께 개척했다는 미국인 등산가 이본 취나드가 그걸 양팔로 넓게 잡아 찍어 누르면서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해보았지만 당시 어림도 없었다. 분하고 억울했는데 마침 그 비슷한 걸 흔들바위에서 찾았으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나는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충길이가 그걸 해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속으로 경탄했다. ‘야, 이놈 봐라. 이리 어려운 것을 해내다니. 나도 못 하는 것을’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아직 모자란다는 걸 절감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길러냈다는 것으로 위로하면서 나는 바로 울산바위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랐다.
작년에 개척했던 길 근처에서 적당한 곳을 골라 새로운 길 하나를 개척할 작정이었는데 울산바위 발치에서는 위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어져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새로운 길 개척은 포기하고 그냥 몸만 풀기 위해서 작년에 개척한 길로 울산바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둘째 날 : 5월 29일 맑음
죽음 직전까지 갔던 표범골 재진입12시경 비선대를 지나 30분 만에 표범골(자즌바위골) 입구에 닿았다. 지난 2월 동계 정찰을 하려다 실패하고 설악골로 넘어가다가 죽음 일보 전까지 갔던 곳이다. 이제부터는 완전 미지의 산이 펼쳐진다. 길도 없고 아무런 인간의 흔적도 없다. 드높은 바위 봉들과 깊은 계곡과 밀림과 무서운 짐승, 그리고 낮에는 태양, 밤에는 공포의 암흑과 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 맨 위 어디쯤엔가 바로 내가 찾는 그 멋진 바위 봉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지도로 보면 수평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급하고 산세가 하도 험준해서 그 봉의 발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만 이틀을 예상했다.
지난 겨울 정찰 시 우리의 길을 막아섰던 첫째 폭포에 도착했다. 그때와는 달리 빙벽 대신에 폭포가 되었고, 양쪽의 바위 절벽에도 여기 저기 작은 잡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잘 살펴보니 우측으로 잡목 벽을 타고 오르면 폭포 위를 끼고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밴드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리로 등로를 잡고 올랐다.
우리 모두 바위타기라면 걷는 것보다 쉬울 정도로 이력이 붙어 있는 산꾼들이었다. 첫 번째 폭포 절벽은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안자일렌하고 그리 어렵지 않게 우측으로 타고 올랐다. 다만 폭포 상단에서 4m 정도 트래버스 구간에서 등에 진 짐이 너무 부담스러워 짐을 풀고 건너서 케이블을 설치한 뒤 짐을 운반했다. 도르래를 타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우리 키슬링 밑으로 폭포가 마치 화가 난 듯이 한층 요란하게 소리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제1폭포를 통과하니 진짜 자즌바위골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진하니 이상하게도 계곡의 물이 말라버린다. 골짜기는 메마른 지 오래된 듯하고 양쪽 바위절벽 위에서 떨어진 바윗덩이와 돌덩이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갈수록 계곡 양옆으로 더욱 높은 바위절벽들이 험하게 치솟는다.
조금 더 전진하니 계곡에 물이 다시 흐른다. 한 굽이 돌아서니 제2폭포가 나타났고, 7m 정도의 암벽이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 중 가장 체격이 좋고 힘이 좋은 승복이가 먼저 옆에 나 있는 수직 크랙으로 대형 키슬링을 진 채 올랐다. 놀라운 힘이다. 나는 도저히 오를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그랬더니 승복이가 다시 내려와 내 짐을 지고 올랐다.
- ▲ 범봉 발치 계곡에서 산목련의 청순한 자태와 향기에 취한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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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위로 올라서니 계곡은 더욱 좁아지고 양쪽 바위벽은 더욱 가파르게 치솟아 수직 장벽을 이룬다. 계곡엔 금세 떨어진 것 같은, 깨어져 속살이 드러난 바위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우리는 계곡에 깔려 있는 바위들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올랐다.
계곡은 점점 더 좁아지면서 양쪽 바위벽들이 수직을 지나 오버행 형태를 이루면서 그 사이로 하늘이 좁고 길게 펼쳐져 있었다. 요델(요들) 소리 외치기도 겁이 났다. 만약 산울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돌들이 계곡으로 떨어져 내린다면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제3폭포가 나타면서 골짜기는 왼쪽으로 꺾였다. 옆으로 크랙을 타고 올라 잡목지대를 헤치며 폭포 위로 올라서니 계곡은 바위절벽으로 꽉 막히고 바로 옆으로 커다란 바위굴이 나타났다. 놀라움과 동시에 겁이 더럭 났다. 무서운 짐승이나 혹은 간첩이라도 숨어 있지 않나 해서다. 우리는 행동을 중지하고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곳을 한동안 주시했다. 다행히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나는 짐을 벗어 두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그리로 접근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막힌 굴이고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쏴~ 하는 소리가 들려서 놀라 쳐다 보니 하늘 위에서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계곡이 다시 우측으로 꺾이면서 거의 수직의 암벽으로 가로막히고 그 암벽 위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상단에서 튀기는 물방울들이 오후 햇빛을 받아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중에 실측해 보니 50m 높이가 되어, 우리는 그 것을 50미폭이라 불렀다.
한참 동안 그 수려한 경치에 취한 우리 입에서는 탄성이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어떻게 오를 것인지 걱정되었다. 오를 코스를 찾기 위해 폭포 앞으로 다가서 보니 다행히 오른쪽으로 짐을 진 채 클라이밍이 가능한 바위절벽이 펼쳐 있었다. 그러나 깨끗한 통바위가 아니라 구들장 같은 돌들이 떨어지기 쉽게 역층으로 쌓여 있었다.
나는 줄을 매고 단단히 확보를 보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기어올랐다. 등반은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무거운 짐과 낙석 때문에 매우 위험했고 힘이 들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걸려 있거나 붙어 있는 구들장만 한 돌들이 잘못 잡거나 잘못 디디거나 하면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 제일 중요한 일은 후등자들을 낙석의 위험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고, 낙석에 자일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불안정한 돌들도 쓸모가 있었다. 힘주는 각도에 따라 떨어지지 않고 훌륭한 홀드로, 또는 발 디딜 곳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제일 중요한 것은 등반선을 반드시 사선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고, 절대로 연속등반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낙석에 의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등반 때문에 계속 떨어지는 커다란 돌덩이들이 바위에 부딪치면서 튀고 깨지는 소리가 폭음을 내면서 계곡을 뒤흔들고 바위 타는 냄새와 먼지가 좁은 협곡을 꽉 메웠다. 식은 땀, 더운 땀, 그리고 비지땀까지 함빡 흘리고 나서야 우리 세 명 모두 폭포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등에 무거운 키슬링을 진 채로.
폭포 위에 무사히 올라서니 모두 힘이 빠져버렸고 곧 날도 저물 기세였다. 험악한 바위 절벽이 좁은 간격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이라 함께 비박할 자리는 고사하고 단 한 명이 누울 만한 자리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행동을 중지하고 각자 넙적한 돌들을 주워 모아 잘 깔아서 자기의 잠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각자 잠자리 터를 만든 뒤 짐을 풀고 저녁준비를 위해 모닥불을 지필 즈음 어둠은 순식간에 좁은 계곡에 들어차버렸다. 양쪽 바위절벽 틈새로 좁은 밤하늘이 계곡을 따라 길게 펼쳐지고 그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계곡 속은 이미 완전한 암흑 그 자체였고 그 속에서 활활 타는 모닥불만이 우리들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충길이와 승복이는 벌써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이었다. 나는 사나운 맹수들의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아주 크게 지폈다. 그리고 모닥불에 항고를 걸어 저녁을 지어먹고 커피를 한 사발씩 마신 후 각자 자기의 비박자리를 찾아서 침낭을 펴고 그 속으로 누에처럼 기어 들어갔다. 온 몸은 침낭 속에 포근하게 묻혀 있지만 천막 없는 비박인지라 얼굴만은 찬 공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얼굴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지고, 계곡 위 바위능선에서 몰아치는 밤바람은 마치 악마가 몸부림치며 흐느끼는 것처럼 들려왔다. 피곤함과 두려움으로 곤죽이 된 채 모두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셋째 날 : 5월 30일
토왕성폭포 닮은 100m 폭포 풍광에 한동안 넋 잃어다음날 아침 날씨는 쾌청했다. 지난밤의 두려웠던 암흑과 바람소리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좁은 바위 계곡은 이리저리로 돌면서 계속되었다. 걷는 것보다는 손과 발의 모든 기능을 쓰면서 바윗덩어리들을 타고 오르내리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계곡등반도 분명 암벽등반의 한 형태라고 확신되었다.
얼마 후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면서 시야가 확 트이는 듯싶더니 이번에는 아예 하늘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우리 앞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극장의 대형화면처럼 우리의 시야를 꽉 채우면서 우리가 갈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딱 중간쯤에서 2단으로 잘려 있었고 하늘 꼭대기에서 수직의 바위 절벽을 타고 2단계로 떨어지는 모습이 토왕성폭포를 빼어 닮은 아주 수려한 폭포였다. 토왕성폭포는 외설악의 가장자리, 그것도 설악동 근처에 있어 이미 세인에게 떠들썩하게 널리 알려진 절세의 미폭이지만 이것은 외설악의 가장 깊은 곳에 이름도 없이 수줍게 숨어 있는 절세의 미폭으로서 우리 앞에 처음 그 수려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 범봉 등반을 시작하는 필자. 올라야 할 바위 틈새마다 에델바이스가 꽉 들어차 눈부시게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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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의 아름다움에 한참 동안 넋을 잃은 후에야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여전히 그 멋진 봉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폭포 절벽 위에 올라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기를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다시 탐색하는 수밖에 없어 지도를 펼치고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현재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지점의 지도가 잘못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직에 가까운 100m 절벽이 등고선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뒤에 우리는 이 폭포를 오른 후에 100m폭포라 이름 지었다).
어쨌든 계곡의 굴곡 모양으로 우리의 위치를 지도상에서 알아내어 그 암봉의 추정 위치에 이르는 새로운 코스를 잡아내었다. 폭포 우측으로 난 아주 작고 얕은 실폭포를 타고 오르면 바로 그 바위 봉이 나올 것 같아 그리로 올랐다.
마침 물이 말라 있어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대신 잡목들이 단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어 큰 짐을 메고 후비적대며 오르다 보면 짐이 나무에 걸려 넘어졌다. 균형 잡기 위해 엉겁결에 잡은 것이 가시나무라서 비명을 지르고, 땀에 젖은 몸에 부서진 나무껍질들이 달라붙어 온몸은 따끔따끔했다. 이건 멋진 등반이 아니라 가시밭 고행이었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드디어 폭포 위로 올라섰다. 조그만 암릉으로 올라서니 바로 그 멋진 봉이 갑자기 우리 코앞에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그 암봉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군계일학의 미인을 먼발치에서 얼핏 한 번 보고 한눈에 반해서 그 군중 속을 헤치며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찾아낸 격이었다.
나는 바로 그 발치에 서 있었다. 그 봉에 내 몸뚱이를 비벼보기 위해서. 자즌바위골에 들어선 지 만 2일 후였다. 그것은 분명 만 2일간의 어렵고 힘든 또 다른 형태의 암벽 등반인 계곡등반이었다.
넷째 날 : 1967년 5월 31일
에델바이스로 꽃단장한 범봉그 바위 봉 바로 아래 계곡에서 비박하고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암벽장비만 챙겨 가지고 나는 듯이 올라 그 바위 봉 시작점에 섰다. 날씨는 쾌청했고 아침 햇살이 시선 방향이라 봉우리 전체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전체 모습은 마치 인수봉처럼 대포알같이 생겼고 서남쪽 전면은 표면이 매끄러워 등반하기에 매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오른쪽, 즉 동남측면으로는 남면과 동면이 이어지는 모서리로서 여러 개의 작은 바위봉과 바윗덩어리가 겹쳐 쌓인 모양으로 작고 가파른 암릉을 형성하고 있었다. 거기엔 크랙과 변형 침니가 잘 형성되어 있고, 또한 군데군데 잡고 디딜 만한 바위 턱들이 잘 형성되어 있어 등반이 무난할 것 같았다. 나는 그리로 방향을 잡고 올라서 본격적인 암벽등반 시작점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때까지 노래 가사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등산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신비의 꽃 에델바이스가 한두 송이가 아니라 온통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우리 이름으로 ‘솜다리’라고 불리는 이 에델바이스는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설악산 화채봉 근처에서만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 1, 2 범봉에서 선등하는 필자. 3 범봉 정상 꼭짓점에서
- 요델 기를 휘날리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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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토록 귀한 것이 그 바위 봉 발밑에서 시작해 그 바위 봉에 난 모든 틈새들을 타고 오르면서 눈부신 빛깔로 줄을 지어 피어 있었다.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이었다. 설악산 신령님께서 자신의 봉우리 중 제일 아름답고 고고한 처녀봉을 아주 귀한 꽃으로 단장까지 해놓고 나를 신랑감으로 점지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인간의 손때를 거부한 채 태고의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더구나 아름답고 고상한 에델바이스로 곱게 단장하고 있는 처녀봉의 처녀바위를 오르는 순간 내 마음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발 디딜 곳과 잡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뽑아내야 했다.
암질은 예측대로 장년기의 화강암으로 선인봉이나 인수봉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암벽등반에 이상적이었다. 더구나 모든 면이 처녀바위라서 까칠했기 때문에 마찰력은 더 없이 좋은 상태였다. 반면에 크랙 속에 처박은 내 손은 처녀바위의 까칠함 때문에 금방 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몇 백만 년 동안 간직해 온 처녀성의 날카로움이기에 아프면서도 쾌감이 있었다.
- ▲ 범봉 정상에 설치한 동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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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호랑이가 동해 주시하는 형상
내 앞에는 길이 전혀 없는 원시상태의 바위 절벽이 광활하게 하늘을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를 꼼짝 못 하게 묶어버리는 공포의 공간이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그런 자유공간이었다. 내가 올라가는 궤적이 바로 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구간마다 확보점을 설치해 안전을 도모하면서 되도록 시야가 트이고 몸이 허공으로 노출되는 멋진 등반선을 찾아서 올랐다. 그러나 등반선의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정상으로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확인하느라 애를 썼다.
네다섯 시간 후 우리는 정상에 도달했다. 때는 1967년 5월 30일이었다. 자즌바위골로 들어서서 바위계곡과 절벽을 타고 오르면서 2번의 비박을 하고 3일째였다. 정상은 온통 시커먼 석이버섯에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꼭짓점을 이루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한 마리의 호랑이가 북쪽을 향해서 웅크리고 앉아서 고개는 동쪽으로 돌려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주시하는 모습이었다. 호랑이라. 그건 바로 우리 땅 한반도의 터줏대감이 아니던가. 그래서 뒤에 나는 이 봉을 ‘범봉’이라 이름 지었고 지금은 지도에까지 그렇게 표기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시 자즌바위골을 표범골로 작명하고 등반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었다. 도봉산 선인봉의 표범길과 관련짓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범봉은 표범길과 관계없이 그 자체의 형상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지어진 이름이다 보니 골짜기 이름도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게 명명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초의 의도를 포기하고 설악동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 자즌바위골(잦은바위골)을 따르기로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초등의 환희와 더불어 나는 사방으로 펼쳐지는 외설악의 진정한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바로 남쪽으로는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거리에 공룡릉의 사나운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떼 지어 나의 시야를 꽉 채우면서 서북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나는 마치 아이맥스 극장에서 초대형 화면을 통해서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바로 나의 코앞에 펼쳐지는 공룡릉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공룡릉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간 고개를 돌리면 대청봉의 거대한 덩치가 하늘을 가리고, 고개를 더 돌리면 멀리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공룡릉을 따라 서북쪽으로 훑어가면 마등령과 이어지고, 거기서부터 마등령 능선이 길게 동쪽으로 뻗어 내리고 그 너머로 울산바위의 은빛 장벽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성곽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화채봉 능선이 하늘과 땅 사이의 지평선을 이루면서 나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의 시야는 자연스럽게 장성으로 둘러싸인 외설악 그 안으로 제약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바위봉들이 마치 백만 대군의 기치창검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고 마침 오후 늦은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햇빛과 햇볕, 바람과 비와 눈 그리고 안개와 서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거대한 돌덩이를 깎아서 이토록 오묘한 형상의 외설악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외설악 전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보는 높이와 위치가 적절해야 하고 햇빛 방향이 시선과 일치해야 하는데 이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곳이 바로 범봉 정상이었다. 이렇게 외설악의 전경을 볼 만한 곳이 몇 곳 있지만 높이와 위치가 맞으면 햇빛 방향이 안 맞고, 햇빛 방향이 맞으면 높이나 위치가 안 맞아 그동안 외설악 전경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다.
높이와 위치로 볼 때 울산바위 정상이나 권금성 정상에서도 외설악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는 기껏해야 겨우 외설악의 실루엣 정도를 보는 것이 전부다. 왜냐 하면 그 봉우리에 오르면 오후 늦은 시간이 되고, 따라서 햇빛이 좋아도 역광이 되기 때문이다.
위치나 햇빛 방향으로 볼 때 소청봉에서도 외설악 전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높이 차이가 너무 크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원경이 되어 잘 감상할 수 없다. 어쩌면 범봉이 외설악 전경을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명당자리기에 내가 이토록 애써 찾아 올라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나는 아름답고 신비한 외설악 전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 ▲ 설악골 쪽으로 뻗어 내린 암릉. 후에 석주길이라 명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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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암릉 등반 태몽 이후 몇 해 동안 개척등반 즐겨
시선을 조금 당겨서 범봉 아래로 맞추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범봉에서 시작해 여러 개의 암릉들이 형형색색 다른 모습으로, 어떤 것은 마등령 쪽으로, 또 어떤 것은 비선대 쪽으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정말로 완벽한 암릉으로서 어떤 것은 칼날 같은 모습의 나이프 리지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런 나이프 리지를 이루는 암릉은 우리 땅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는데 그런 칼날 암릉들을 바로 설악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젠 내게도 멋진 칼날 암릉 등반이 그림의 떡만은 아니었다. 그걸 타고 등반한다는 것은 바로 하늘을 거니는, 하늘길을 오르는 느낌일 것 같았다. 그야말로 천상의 신선 바로 그 기분일 것 같은 느낌이 들며 내 속에서 강한 등반 욕구가 일었다. 바로 이것이 설악산 암릉 등반의 태몽이었다.
그 후 나는 외설악 한가운데 숨어 있는 그 멋지고 오묘하며 깨끗한 암릉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시작점부터 끝점까지 암릉을 타고 오르는 것을 즐기면서 몇 해를 보냈다. 바로 석주길 암릉, 칠형제봉 암릉, 범봉 연봉, 동원암 암릉 등이 그것이다. 때로는 보름달 밤에 달빛에만 의지해 밤새 오르기도 했고, 때로는 투명한 태양빛 속에서 발가벗은 알몸뚱이에 자일을 매고 하루 종일 오르기도 했고, 때로는 암릉 위에서 비박하면서 설악의 요정들과 밤을 희롱하기도 했다.
- ▲ 천불동계곡 쪽으로 내려 뻗은 암릉. 후에 칠형제봉 암릉이라 명명
- 등반문화적 고찰
범봉의 발굴 및 초등은 우선 나에게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땅의 등반문화에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구하라 얻으리라 어느 날 문득 운해 속에서 순간적으로 떠올라 내 뇌리에 각인된 범봉, 그것을 찾아서 외설악을 샅샅이 뒤져 결국은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의 환희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은 ‘찾으라 보리라’ 그리고 ‘구하라 얻으리라’였다. 그 후부터 나는 바로 이 정신으로 내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아주 깊이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범봉들을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혼신을 바쳐가면서 평생을 살아 온 것이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자아탐구에서, 나의 학문세상에서, 나의 직업세상에서, 나아가 나의 취미세상에서까지도 범봉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 가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범봉 등반의 거벽성 범봉 등반은 하루 만에 이루어졌지만 범봉 발치까지 접근을 위한 2일간도 암벽등반 수준이었고 1일간의 철수 또한 암벽길 하산 수준이었기에 사실상 4일간에 걸친 암벽등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시작에서 끝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비박해 가면서 했다. 이렇게 보면 요즘의 세계적 거대 암벽등반과 그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설악산 개척시대를 열다 당시 설악산 약초꾼들이나 사냥꾼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자즌바위골을 탐험해 멋진 범봉을 찾아내서 개척 초등한 나의 등반기록은 우리 땅의 설악에서도 개척이나 초등까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획기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도봉산에서의 양지길, 허리길 그리고 표범길이 이 땅의 산꾼들에게 개척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도봉산과 인수봉에서 개척시대가 열린 것처럼 설악에서도 1970년대 중후반에 개척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등반의 불확실성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으로 1,200분의 1 지도까지 손쉽게 볼 수 있는 시대다. 당시 2만5,000분의 1 지형도에 비하면 대충 20배의 정확도다. 이는 내가 시력 0.1 정도, 즉 거의 장님시력으로 설악산지형을 탐색해 범봉을 찾아내고 거기에 접근했다면 지금은 2.0 시력으로 설악산 지형을 탐색하는 격이다. 더구나 위성을 이용한 GPS라는 위치측정기구는 그토록 정확한 지도 속에서 불과 몇 십m의 오차 범위로 현재의 위치까지 잡아 준다. 당시와 비교해 보면 거의 신의 눈이라 할 정도다.
정확하고 편리해서 좋기는 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모험성이 상실되고 만다. 등반이 인간을 매혹하는 바로 그 묘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문명의 이기가 어떤 이유로든 사용불가능하게 되는 경우가 닥치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고 바로 심각한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면 문명의 이기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 험한 미지의 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장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등반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등반의 모험성 당시 범봉 등반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모험성이 매우 큰 등반이었다. 접근로부터 형상의 험준함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지성,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모험성은 극대화되었다. 또한 지도의 불확실성으로 해서 그 도가 더해졌다. 모험은 언제나 몸과 정신에서 최선을 아주 자연스럽게 끄집어내기 때문에 나는 모험을 매우 좋아했고, 바로 그 모험성이 내게 강한 등반동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등반에서 이런 모험성을 배제시키는 지나치게 강력한 도구나 장비들에 의존하는 현대등반 방식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등반장비점 천국이 형성되어 있음은 이 땅의 등반문화가 정신보다는 물질에 우선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에 더욱 그러하다.
범봉이라는 명칭 범봉은 내가 찾기 전에는 미지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름이 없었다. 봉우리 이름은 보통 발견자 또는 초등자가 지어 붙이게 마련이다. 지구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발견해서 그 높이를 측정해 낸 사람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자인 힐러리 경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발견자가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면 당연히 초등자의 이름을 따서 힐러리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봉의 경우는 발견자와 초등자가 동일 인물이다. 그런데 그 명칭에 대해서 설악산국립공원관리소는 설악산 공룡릉 망경대에 아주 크고 단단하게 설치한 안내판에 범봉의 위치와 더불어 이런 설명을 적었다. ‘범봉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범봉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범선처럼 보여서 이름이 지어진 듯하다’고. 제법 그럴듯한 상상력이다. 그러나 시 한 수가 아닌 안내문일진데 그런 개인의 추측보다는 진실을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범봉 초등자에 대한 오류 정정 그동안 나의 블로그에 남긴 산발적인 등반기록 중 범봉 초등 시 내가 송준호와 오세진을 동반한 것으로 잘못 표기된 문서들이 존재한다. 이는 내가 범봉 초등과 그 다음해에 이어진 석주길 초등을 오랜 세월로 인해 잠시 혼돈해서 생긴 오류였다. 따라서 이 기회에 공식적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범봉 초등자는 나 백인섭, 유충길, 장승복 세 사람이다.
필자 소개
서울 태생(1942), 경복고, 서울대공대(전기공학), 카이스트(전산학 석사), 프랑스IMAG(전산학 박사), 한국과학기술연구소(선임연구원), 한국데이터통신 (연구소장), 아주대 정보통신대(교수) 역임.
취미활동 등산, 스키, 테니스, 윈드서핑
등반경력 도봉산 선인봉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설악산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등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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